대종사의 호랑이띠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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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의 호랑이띠 제자들
  • 한울안신문
  • 승인 2009.12.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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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산교당 김선명 교무

호랑이 해인 2010년 경인년(庚寅年) 새해를 맞이하였다.


십이지(열두 띠) 속의 호랑이는 쥐와 소를 이은 세 번째 동물로서 시간적으로는 음력 정월과 오전 3시~5시에 해당된다. 경인년의 경(庚)은 서쪽, 금(金)을 뜻한다. 금의 색깔은 흰색이라, 그래서 금년은 60년만에 돌아온다는 백호랑이띠이다.


동양에서 호랑이는 동물의 왕이며 영물(靈物)로 통한다. 이와같이 계절로는 긴 겨울을 지나고 새 봄을 맞이하는 시기, 긴 밤을 보내고 새 아침을 맞이하는 시기인 인(寅)에 동물의 왕이며 영물인 호랑이를 배치하여 그 호랑이의 강인함으로 새 아침과 새 봄을 강하고 힘차게 열어주기를 희망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흔히 호랑이띠로 태어나면 호랑이의 특성에 비유하여 성질이 불같다거나, 과감하고 리더십이 강하고 독한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금년은 60년만에 돌아오는 백호(白虎)의 해이니 더욱 좋다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사실 寅에 호랑이를 대입시킨 것은 그러한 희망을 반영한 것이다. 호랑이띠에 태어나면 호랑이의 성품을 닮는다고 하는 것 또한 아이러니이다.




# 정토 원훈 양하운 선진


대종사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호랑이띠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는 1890년 경인생(庚寅生)이다. 한 살 아래인 소태산 대종사와 16세에 결혼하여 초창기의 어려운 교단 창립에 내조와 후원을 다하여 정토원훈(正土元勳)으로 존경받고 있다. 방언공사때 대종사 사가살림을 처분하여 조합에 출자하니 살던집이 없어져도 아무런 불평이 없으셨다. 이후 익산에 총부를 건설할제 익산으로 이사한 이후에도 일정한 집이 없이 수차례 이사를 해야 하는 등의 간고한 살림에도 공부심을 잃지 않았으며 생활대책이 막연하여 삯바느질과 남의 집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회보 64호에 실린 이형오의 글을 보자 「 기한(飢寒)을 이기시며 공사(公事)를 위하시는 우리 사모님 생활」이란 제목의 글에서 ‘… 이와같이 곤란하게 살아도 혹자는 종사님께 회원의 것을 걷어다가 자기와 처자가 호화로운 생활이나 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가질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는데, 더구나 편히 먹고 잘 입고 호강스럽게 살아보소. 천만인의 고혈을 빨아다가 자기 이욕만 채운다고 험악한 말이 많을 것일세. 하물며 내가 공사에 큰 보조는 하지 못할지언정 공사에 전력하시는 종사님에게 추호라도 방해될 일을 하여서야 되겠는가. 또는 내가 공중의 물건을 먹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없이 먹는 것은 그이상 더 큰 죄가 없는 일이니 나는 종사님 공사하시는데에 방해되지 않게 하고 또는 죄도 짓지 아니하고 차라리 삼순구식(三旬九食)을 할지라도 오직 내 힘으로 내 생활을 하여가는 것이 이 이상 행복되고 양심상 편안한 일이 없네…’ 라고 적고 전무출신의 공사정신과 정토회원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당부하고 있으니, 다만 그에 미치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다.




# 최초 견성 인가 김기천 선진과 지극한 공부심의 김대거 선진


삼산 김기천 종사도 대종사님보다 한 살 연상이다. 천정리 사람으로 일찍이 대종사님과 교분이 있어 제자가 되었다. 원기 13년 가을 삼산이 39세 되던해 새 회상이 생긴 이래 공식적으로 소태산은 최초의 견성인가를 내린다. 그 내용은 성리품 22장에 나와 있다. 삼산은 많은 가사와 산문을 남겼는데, 오직 자신의 수행과 적공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특히 견성 이후 자필에 의해 발표된 글이라 끊임없는 공부심이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깨달았으나 대중살이 속에 모나지 않고 더욱 정진하였고 누구보다 규율을 잘 지켰다. 대종사께 문답을 즐겨하였고, 회보에 실린 가사와 산문들은 일반회원들의 공부심을 진작하였다. 특히 부산지방의 교화를 위해 전심전력하여 지역의 몰이해와 비협조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오직 수양력으로 이를 극복하며 교화에 전력을 다하여 부산교화의 토대를 닦았으며, 무산자를 위한 야학을 개설하여 지역사회에 아동들의 문맹퇴치에 앞장서다가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교화현장에서 순직하였다.


대산 김대거 종사는 1914년 갑인생(甲寅生)이다. 원기 9년, 11세에 만덕산에서 대종사를 처음 뵙고 원기 14년 16세에 총부로 와 출가하여 대종사와 은부자(恩父子)의 의를 맺고 열반하기까지 14년간을 총부에서 모시고 살았다. 이후 일생을 소제(小弟) 소동(小童) 소자(小子)로 겸허히 살으셨다. 종법사에 오르신 후에야 어느날 시자인 좌산 이광정을 성탑으로 부르시어 태조사 콩주머니를 넘겨 주었다. 지극한 공부심이다. 열반을 앞두시고 삼성병원에서 퇴원하여 구조실에서 계셨다. 모든 대중들이 구조실에 모여 쾌유를 기원하는 가운데, 가끔 눈을 뜨고 대중을 보시고 다시 눈을 감으시며 의식이 ‘있다 없다’를 반복하셨다. 창문너머 대산종사님의 모습을 뵙는데, 의식이 없으신 가운데에도 오직 단전에 기운을 놓치지 않으시고 힘차게 하단전에 기운이 드나듬을 대중들은 여실히 뵈었다. 아! 얼마나 용맹정진하셨으면 생사의 위경을 넘나드는 이순간에도 단전주를 하실까? 지금도 나태와 안일함에 물들 때 이순간을 생각하면 모골(毛骨)이 송연하다.




# 대의일관 용타원 선진


용타원 서대인 종사도 1914년 갑인생이시다. 대종사님으로부터 邪가 떨어진 도인이라고 인정을 하셨다. 대종사님으로부터 좌산종사에 이르기까지 역대 종법사님에 대한 신성을 한결같이 하시며, 후진들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말없는 가운데 교단의 구석구석에 기운이 미치지 않는곳이 없었으며, 근심과 걱정거리를 가지고 오는 후진들을 보듬고 들어주시며 해결의 실마리를 얻어갈 수 있도록 하시며, 교단의 어버이로 모든 대중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몸에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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