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겸손하신 천진 보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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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겸손하신 천진 보살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1.2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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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경식 교도의 틈새선진열전 9 / 상산 박장식 편

내가 상산님을 처음 뵈온 것은 역시 서울교당 새내기 청년교도였을 때다. 약간 구부정한 인상이지만 긴 목에 키도 크시고, 희고 깨끗한 안색에 옛날식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쓰신 분이었다. 내가 처음 뵈었을 때가 쉰을 겨우 넘긴 연세였을 텐데 한복에 삭발머리라서 그런지 시골 할아버지 스타일이었다.


지금도 그런 느낌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때만 해도 짧은 역사의 미니 교단으로서 원불교도들이 가지는 콤플렉스인즉 원불교가 남들에게 유사종교 취급을 당하는 설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지방신문 귀퉁이에라도 원불교 소식이 실리면 고마워서 감격하는 분위기였고 덜 좋은 기사가 나면 금세 주눅이 들었다.


한번은 모 일간지에 원불교를 비하하는 기사가 났다고, 초발심 수준인 나는 혹시 상처를 입을까 싶어 끼워주지도 않은 채, 교우회(현 원대연+원청) 회원 몇 분이 수군거리더니 항의전화를 걸기로 하였다. 누가 걸까, 어떤 식으로 항의할까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더니 결론이 나왔단다. 대표는 명문대 대학원생 모씨가 나서고, 통화 첫 멘트인즉 “저는 ××일보 애독자의 한 사람입니다”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등등.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지만 당시엔 그런 게 그렇게나 심각한 분위기였다.


교도들이 말하기를, 상산님은 경기고 전신인 경성제일고보에다 서울법대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 나오신 최고급 엘리트라고 했다. 그런 말 속엔 영광 두메 촌사람들만이 아니라 당대 일급 인텔리도 원불교 간부 중에 있다는, “그렁게 우리 원불교를 깔보지 말랑께!”라는 과시성 안간힘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상산님은 뭐 그리 똑똑해 보이거나 세련되지도 않았고 말씀하시는 것도 어수룩한 시골사람 그대로였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듯 반짝이고 예리한 눈빛을 가진 수재형도 아니었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신념에 찬 듯 다부지게 버티고 서는 열혈투사형도 아니었다. 어딘가 헐렁해 보였다. 만만해 보였다.


그래도 내가 상산님으로 인해 위로받은 게 하나 있다면 법명 콤플렉스다. 본명 혜화가 여자 이름 같다고 놀림 받던 처지에 법명 경식이 남자 이름답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경식이라면 속명 같지, 법명 같은 깊은 맛이 없지 않은가? 너무 싸구려로 지어 준 것 아닌가 싶어 불만이 컸다. 특히 심을 식植 자라면 속명 가운데도 남자 이름에 흔해 빠진 것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지금도 혜화를 법명으로 경식을 본명으로 아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나마 위안이 상산님이었다. 원불교의 고위 간부 되신다는 이 분도 식植자 돌림이 아니더냐.


한번은 말씀 끝에 내가 불쑥 여쭈었다.


“대종사님이 구도과정에서 왜 유·불·선이나 기독교·동학·증산도 경전을 구해 공부하지 않으시다가 대각 후에서야 열람하고 ‘나의 안 바는 옛 성인들이 또한 먼저 알았도다’ 하셨는가 이해가 안 됩니다. 엉터리 도사부터 걸인까지 모셔다 도를 물었다면서 왜 당대 고승들이라도 찾아다니며 도를 묻지 않았을까요? 길룡리가 아무리 궁촌벽지라 하지만 가까이 불갑사, 선운사 같은 큰 절도 있는데 거기 가서 스님들과 문답하거나 불경이라도 구해서 읽었어야지, 대각 후에 겨우 불갑사 금강경 갖다 읽으시고 뒤늦게 부처님이 성중성이요 불법이 제일이라니 생뚱맞지 않습니까?”


원불교가 불교의 종파가 아니냐 하는 것은 그때 원불교가 시달리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때는 군사정부에 의해 1962년에 만들어진 불교재산관리법에 원불교가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고 보니 정통성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는데 겁도 없이 내가 만용을 부린 것이었다. 상산님은 얼른 대답을 않고 뜸을 들이셨다. 나는 상산님이 아무리 최고 엘리트라 하더라도 나의 일격을 못 이기고 외통수에 빠져 들었다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구도과정에서 왜 절에 안 가셨을까? 왜 불경은 진작 안 읽으셨을까? 그런 말이지?”


“네, 바로 그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 그런데 대종사님이 절에 간 적이 없다든가 불경을 본 적이 없다든가 누가 그렇게 단정하던가?”


그것은 마치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한번 알아보자”는 말투였다. 나는 이런 애매한 태도가 마음에 거슬렸다. 그렇게 엉거주춤 얼버무리지 마시고, 지성인이라면 보다 확신을 가지고 명쾌한 논리로 나를 압도해 주시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인텔리 법사요 엘리트 전무출신이 아니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내 깜냥으로는 덕장보다 지장 내지 용장이 멋져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산님은 표정부터 말씀과 몸가짐 등 모두가 겸손할 뿐이었다. 답답해하는 내 꼴이 안 됐던지 한 마디 흘려주셨다.


“언제는 청산이 거기 없었던가? 봉사니까 못 본 거지.”


훗날 소태산 가사를 보다가 <안심곡>의 별칭이 ‘奉事見青山’(장님이 청산을 보다)임을 알고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1980년대, 하루는 상산님이 내가 다니던 도봉교당에 오셨다. 그때 난 한 가지 의문이 생겨서 고심 중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49일쯤 중음에 머무르다가 새 생명을 받는다고 했것다. 그러면 몸을 받기 전 중음에 있는 동안에는 업을 짓는가 안 짓는가? 신·구·의 삼업이라 했는데 몸도 없고 입도 없는 영가가 뜻(意)만 가지고 업을 짓는가? 아니면 중음에 있는 동안에는 신업身業이나 구업口業뿐 아니라 의업意業도 일시적으로 중단되는가?


내가 모시고 다과 접대를 하며 이런 저런 말씀을 받들던 중에, 옳다구나 기회다 싶어 여쭈었다.


“법사님! 중음에 있을 때에도 작업은 이루어집니까? 아니면 일시 쉽니까?”


긴장하고 기다린 것은 명쾌한 대답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엉뚱한 반문이었다.


“교무님한테 여쭈어 보았나?”


“아… 아직 여쭈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교무님한테 여쭈어 보게나.”


아시면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시든가, 모르시면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고백을 하시든가 그러실 일이지, 왜 말을 돌리십니까? 저 상산님께 실망했습니다. 속으로 안간힘을 쓰긴 했지만, 나는 이내 감을 잡았다. 임제의 할喝인지 덕산의 방棒인지 잘은 모르지만 상산님은 내 우둔한 머리에 일격을 가한 것이었다.


저 다니는 교당의 지도 교무님은 시시하게 보고 총부에서 오신 큰 스승이나 상대하려는 그 아만심! 무얼 좀 안다는 상相에 가리어 담당 교무를 제쳐놓는 태도가 바른 공부길이 아님을 일깨우신 것이려니! 나는 늘 이렇다.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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