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뿌리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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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뿌리내리기를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5.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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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혜경 사)평화의친구들 간사의 다섯번째 아이티 이야기

새벽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 눈을 떠보니 텐트 바닥에 물이 차올라 옷이 온통 젖어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물품들이 상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그나마 물기 덜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달리 누울 곳이 없어 뜬 눈으로 새벽 동트길 기다리고 있는데 오가는 길에 지나쳤던 난민촌이 생각났다. 멀쩡한 텐트도 방수처리를 안하면 이렇게 물이 새는데, 나무막대를 천으로 덮어 만든 임시 거처가 이 비를 견뎌냈을까. 우리야 하루 이틀 고생하면 끝이지만, 닥쳐오는 우기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비에 젖어 잠들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잠을 설쳐 새벽에 일어난 덕에, 한 시간 일찍 진료소로 향할 수 있었다.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있었고 그 중 반 이상은 어린아이들이었다.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진료를 시작했다. 환자 수가 생각보다 훨씬 많아 약간 벅차긴 했지만, 대원들 모두 바짝 힘을 내 돌려보내는 환자 없이 모든 진료를 마쳤다. 국경에 갔던 실무팀도 구호물품 차량들과 함께 기쁜 걸음으로 돌아왔다.


차량에서 내린 많은 양의 구호물품들은 가구별로 배급할 수 있게 봉지봉지 나눠 담아야했는데, 현지 분들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밤늦게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작업을 마친 늦은 밤, 눈꺼풀에 무겁게 내려앉은 피로를 느끼며 텐트로 향했다. 뿌듯하고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복잡해서 잠이 안왔다. 주어진 일정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가 떠나고 나면 그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힘겨운 일상을 이어갈 것이다. 아까 낮에 뒤에서 몰래 다가와 내 손을 꼭잡았던 어린 소녀의 웃는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난민촌이 모여있는 델마 지역에 구호물품과 교환할 수 있는 쿠폰을 돌리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쿠폰 지급은 효과적이고 공평한 배급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으로, 각 가정에 한 장씩 전달됐다. 아이티와 도미니카 대원들이 배급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몇몇 현지인들과 함께 안전 문제를 책임져줬고, 덕분에 현장 정리가 잘 되어 물품 배급을 신속하게 마칠 수 있었다.


아이티, 도미니카, 원불교의 NGO가 아이티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지속적인 힘을 모으기로 약속하는 MOU 체결이 끝나고, 어린이들을 난민촌 내 거처로 데려다줬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어하는 아이 손에 끌려 들어간 천막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결연 대상이 된 어린이들은 대부분 지진으로 아버지를 잃고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이어서 상황이 더 안좋았다. 여기가 우리집이라며 빠진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는 아이를 보니 코끝이 찡해져, 팔을 끌어당겨 꽉 안아주었다. 긍정적이고 기운찬 모습 그대로 현명하게 성장할 수 있기를, 이 교육의 씨앗이 뿌리를 깊게 내려 아이들의 삶에 든든한 뒷받침이 되기를.


그렇게 아이티에서의 구호 활동을 정리하고 머나먼 길을 날아 한국에 돌아왔다. 대원들과 이별 후,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정돈이 잘 된 한적한 공항 풍경이, 터덜터덜 혼자 걷는 외로운 걸음이, 낯설고 멍하다. 난민촌 어느 구석에 마음 한 켠을 뚝 떼어놓고 왔는지, 몸만 돌아와 붕 뜬 채 걷고 있는 기분이다. 다시 또 그 곳에서 그들과 마주하긴 힘들겠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라도 같이 웃을 수는 있겠지. 두고 온 마음이 놓여있는 그 곳에 작지만 질긴 희망이 뿌리내리길 바라며, 짧지만 길었던 여정을 마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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