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 눈을 떠보니 텐트 바닥에 물이 차올라 옷이 온통 젖어있었다. 비몽사몽간에 물품들이 상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그나마 물기 덜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달리 누울 곳이 없어 뜬 눈으로 새벽 동트길 기다리고 있는데 오가는 길에 지나쳤던 난민촌이 생각났다. 멀쩡한 텐트도 방수처리를 안하면 이렇게 물이 새는데, 나무막대를 천으로 덮어 만든 임시 거처가 이 비를 견뎌냈을까. 우리야 하루 이틀 고생하면 끝이지만, 닥쳐오는 우기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비에 젖어 잠들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잠을 설쳐 새벽에 일어난 덕에, 한 시간 일찍 진료소로 향할 수 있었다.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있었고 그 중 반 이상은 어린아이들이었다.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진료를 시작했다. 환자 수가 생각보다 훨씬 많아 약간 벅차긴 했지만, 대원들 모두 바짝 힘을 내 돌려보내는 환자 없이 모든 진료를 마쳤다. 국경에 갔던 실무팀도 구호물품 차량들과 함께 기쁜 걸음으로 돌아왔다.
차량에서 내린 많은 양의 구호물품들은 가구별로 배급할 수 있게 봉지봉지 나눠 담아야했는데, 현지 분들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밤늦게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작업을 마친 늦은 밤, 눈꺼풀에 무겁게 내려앉은 피로를 느끼며 텐트로 향했다. 뿌듯하고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마음이 복잡해서 잠이 안왔다. 주어진 일정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가 떠나고 나면 그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힘겨운 일상을 이어갈 것이다. 아까 낮에 뒤에서 몰래 다가와 내 손을 꼭잡았던 어린 소녀의 웃는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난민촌이 모여있는 델마 지역에 구호물품과 교환할 수 있는 쿠폰을 돌리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쿠폰 지급은 효과적이고 공평한 배급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으로, 각 가정에 한 장씩 전달됐다. 아이티와 도미니카 대원들이 배급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몇몇 현지인들과 함께 안전 문제를 책임져줬고, 덕분에 현장 정리가 잘 되어 물품 배급을 신속하게 마칠 수 있었다.
아이티, 도미니카, 원불교의 NGO가 아이티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지속적인 힘을 모으기로 약속하는 MOU 체결이 끝나고, 어린이들을 난민촌 내 거처로 데려다줬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어하는 아이 손에 끌려 들어간 천막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결연 대상이 된 어린이들은 대부분 지진으로 아버지를 잃고 생계가 어려운 아이들이어서 상황이 더 안좋았다. 여기가 우리집이라며 빠진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는 아이를 보니 코끝이 찡해져, 팔을 끌어당겨 꽉 안아주었다. 긍정적이고 기운찬 모습 그대로 현명하게 성장할 수 있기를, 이 교육의 씨앗이 뿌리를 깊게 내려 아이들의 삶에 든든한 뒷받침이 되기를.
그렇게 아이티에서의 구호 활동을 정리하고 머나먼 길을 날아 한국에 돌아왔다. 대원들과 이별 후,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정돈이 잘 된 한적한 공항 풍경이, 터덜터덜 혼자 걷는 외로운 걸음이, 낯설고 멍하다. 난민촌 어느 구석에 마음 한 켠을 뚝 떼어놓고 왔는지, 몸만 돌아와 붕 뜬 채 걷고 있는 기분이다. 다시 또 그 곳에서 그들과 마주하긴 힘들겠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라도 같이 웃을 수는 있겠지. 두고 온 마음이 놓여있는 그 곳에 작지만 질긴 희망이 뿌리내리길 바라며, 짧지만 길었던 여정을 마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