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 대덕으로 교당의 용상이 되신 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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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 대덕으로 교당의 용상이 되신 여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5.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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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경식 교도의 틈새 선진 열전 13 / 용타원 서대인 편



내가 용타원 서대인 교무님을 가까이 뵌 것은 원기 61년(1976) 5월이었을 것이다. 평택교당을 창립하고 봉불식을 치르던 무렵이었다. 봉불식 후 딴 손님들은 거의 돌아갔지만 몇 분은 남아서 하루를 묵어가시지 않았던가 싶다. 당시 처음 단독 교무로 나오신 우리 교무님을 격려하기 위해 동기동창 되는 젊은 여자교무님들이 여러 분 남으셨고, 어른으로는 용타원 님이 남으셨던 것이다.


내가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당엘 가니 거실 겸 법당으로 쓰는 곳이 시끌벅적했다. 궁금해 문을 열고 보니 여자교무님들이 무슨 우스갯소리를 했는지 맘 놓고 까르르 웃는 판이었다. 두어 분은 벌렁 누워 있다가 나의 출현에 놀라 화들짝 일어났다. 불청객이 나타나 판을 깨고 손님들을 놀라게 했구나 싶어 나는 얼른 문을 닫았다. 다시 부엌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길래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 때는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니던 때인지라 부엌 드나드는 것이 조금도 거리낄 일이 아니던 무렵이었다.


문을 열고 한 발 들이밀던 나는 움찔 놀랐다. 거기엔 용타원님이 한쪽 수채구멍 앞에서 무슨 걸레 같은 것을 손수 빨고 계셨던 것이다. 따져보니 당시 용타원님은 63세, 이미 5년 전에 감찰원장까지 지내신 원로법사이셨던 것이다. 용타원님은 자비스런 눈웃음으로 나를 반기시었다.


“법사님, 여기까지 오셔서 무슨 빨래를 손수 하십니까?”


“괜찮아요. 이 정도 일은 아무 것도 아닌 걸.”


용타원님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걱정 말라는 손짓을 하셨다. 나는 불편하실 것 같아 곧 물러나왔다. 그런데 이 일이 한동안 나를 언짢게 했다. 법당 바닥에 벌렁 누워 까르르 왁자지껄 웃고 있는 젊은 교무들과, 혼자 부엌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빨랫감에 비누칠을 하며 손빨래를 하시는 원로교무, 내가 아는 한 이건 적어도 원불교 예법이 아니었다.


군에서 제대는 했지만 아직 갑호부대(동원예비군) 소속으로 군기가 살아 있던 내게는, 훈련소에서 기간병의 식판을 알아서 대신 씻어 놓지 않았다고 따귀를 맞고 걷어차이며 수모를 당한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나는 손윗사람의 그런 횡포에 분노와 역겨움을 속 깊이 간직하리만큼 권위주의에 저항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건 차원이 다른 것이다. 원로법사에게 빨래를 시키고 고작 서른 살 안팎의 젊은 교무들은 맘 편히 웃고 놀다니! 나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여북하면 이런 군대식 꿈까지 꾸었다. “야, 이 철부지들아! 쫄짜들이 간덩이가 부어도 한참 부었어. 대선배 노인네한테 빨래를 시켜 놓고 젊은 너희는 앉고 누워 시시덕거려? 당장 집합! 종아리 걷고 한 줄로 서!” 이렇게 호통치며 ‘줄빠따’를 치시는 대종사님 모습.


상당히 세월이 흐른 뒤지만, 내가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어느 중견교무에게 고자질을 하며 아직도 화가 난다고 했다. 그러자 그 교무님은 웃으며 말했다. “용타원님은 원래 그런 분이라오. 젊은 교무들이 대신하겠다고 왜 안했겠소만 그 어른은 당신 일을 아랫사람에게 시키는 법이 없다네요.” 나는 비로소 마음이 풀렸다. 그러면 그렇지! 돌아가신 대종사님까지 불러내어 하마터면 젊은 여자교무들한테 애매한 ‘줄빠따’를 맞힐 뻔했네. 나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울 도봉교당에 와서 지내는 동안, 교무님이 총부 가신 길에 용타원님을 뵈면 우리 내외 안부를 꼭 챙기시더란 얘기를 전해 주시곤 했다. 그럼에도 철없고 정성이 부족한 나는 오래도록 어른을 찾아뵙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가 겨우 찾아뵌 것이, 확실한 기억으론 1991년 무렵이다. 내가 ‘소태산박중빈의 문학세계’를 출판한 후 인편에 용타원님에게 책 한 권을 증정하고 나서였다. 대종사 탄신 100주년 기념식 전후하여 총부를 간 김에 수도원에 계시던 용타원님께 인사를 갔다. 정녀의 표상인 양 단정하신 모습에 언제나처럼 해맑은 얼굴, 자비하신 표정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다. 아내는, 왜 용타원님은 늙으실수록 더 예뻐지실까 그 점이 늘 궁금하다고 했지만, 정말 나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 화장품도 안 바르고 성형수술도 하셨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도봉교당에 가서도 주인노릇 하고 공부 잘들 한다니 고맙소. 더구나 이번에 대종사님 문학세계를 써서 효도 한번 잘 했더구먼.”


그러신다고 내가 우쭐할 리도 없거니와, 여러 번 들어본 인사치레인지라 이번에도 그냥 립 서비스려니 하고 건성 들어 넘기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작별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바깥마당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시며 내게 금일봉을 챙겨 주시는 것이었다. 나야 당연히 펄쩍 뛰며 사양했지만, 귀한 책이라 그냥 받을 수가 없다는 말씀으로 설득하시며 굳이 내 손에 봉투를 쥐어주셨다. 열반 전에 한 번도 시봉금을 올린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지금 생각해도 많이 죄송스럽다. 젊은 사람이 열심히 하는 것을 격려하시려는 뜻이었겠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빨래를 후진에게 맡겨 시키지 않으셨듯이 남의 호의를 거저 받지 않으시려는 성미가 한 몫 거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음으로든 말로든 물질로든 힘이 있는 한 선후진에게 베푸시고, 어떤 부담이나 폐도 끼치지 않으려 하신 어른 용타원님, 금품으로나 노역으로나 당신은 남에게 허투루 신세지지 않으려 하셨지만, 정작 당신은 남을 위해서 몸으로든 물질로든 아낌없이 베푸는 자비로운 분이셨다. 언젠가 자식놈이 학교에서 우리 집 가훈을 알아 오란다고 했을 때, 얼결에 나는 「힘이 있으면 남을 돕자. 힘이 없더라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말자.」라고 불러 주었지만, 그나마 용타원님을 빙자한 짝퉁소리였다.


구타원 이공주 종사 만년에 들은 이야기다. 용타원님이 구타원님 수발을 손수 하셨다 한다. 구타원님께서 어느 누구보다 용타원님의 시중 받는 것을 가장 편안해 하셨다고는 하지만 대단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18년 연하라곤 해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아니던가. 구타원님이 96세에 가셨으니 용타원님도 팔순이 가까운 연세라 당장 내 몸도 추스르기 힘들 처지인데 말이다. 웬만하면 젊은 후배에게 미루고 나 몰라라 한들 누가 탓할 것인가. 그러나 노구를 이끌고 몸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베푸는 삶을 거두지 않으신 어른이 그분이다. 뒤에 전하는 말인즉 용타원님의 노년생활표준 가운데 하나가 「내게 당한 일은 남에게 의뢰하거나 의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내 힘으로 살자」였다고 한다.


열반조차 후진에게 폐가 될까봐 그러셨는가? 4월 21일, 예언대로 춥지도 덥지도 않은 철을 택해 가시며, 행복하게 살다 떠나니 부디 열반을 축하해 달라 하신 어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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