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일장 , - 임제가 한 대 때리다
상태바
임제일장 , - 임제가 한 대 때리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6.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김덕권 교도의 청한심성 40

정상좌(定上座)가 어느 날 임제 화상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불법의 가장 요긴한 뜻입니까?”


임제 화상은 대답 대신 선상에서 내려와 멱살을 잡고 뺨을 한 대 때린 후 확 떠밀어 버렸습니다. 정상좌가 멍하니 서 있자 옆에 있는 사람이 말을 했습니다.


“왜 예배하지 않는가?” 정상좌는 이 말을 듣고 예배하러 가다가 홀연히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폭력마저 미화 되는 곳이 선(禪)의 세계라고 합니다. 선에서 난무하는 폭력은 어디까지나 그 속성이 자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덕산의 방(德山棒)과 임제의 할(臨濟喝)이 모두 이 자비에서 비롯된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를 깨우치기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이미 폭력이 아니고 자비로운 교육적 수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에 얼마동안 권투계에 종사한 적이 있습니다. 적절한 비유일 런지 알 수 없으나 권투에서 상대방을 향해 가격하는 멋진 기술은 가히 예술의 경지에 비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이 때 상대방이 미워지거나 자기 뜻대로 기술이 먹히지 않아 선수가 열을 받을 때에는 이미 예술이 아니고 폭력이 되고 맙니다. 사각의 링에서 휘두르는 폭력은 싸움이 아니고 스포츠이고 예술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유일하게 용납되는 폭력이랄 수 있습니다. 미움이 수반 되지 않는 주먹! 그래서 옛날에는 선생님들이 심하게 매를 쳐도 감수할 수밖에 없었고, 선사들이 툭하면 몽둥이질이고 고함을 지르거나 따귀를 올려 부치거나 선판(禪板)과 포단(浦團)을 내동댕이쳐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하는 제자들이 고마워하고 예배를 드리며 감지덕지하니 말입니다. 그것은 이 폭력이 살인도(殺人刀)로서의 폭력이 아니라 활인검(活人劍)으로써의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권투선수가 마음을 비우고 싸울 때 예술의 경지로 승화 시킬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자대비의 폭력은 어떤 것일까요?


옛날 중국의 황하(黃河)가 용문이라는 곳에 대화산(大華山)이라는 큰 산이 솟아 있어 물이 동쪽으로 흐를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큰 비라도 내리면 강물이 범람해 피해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이 때 이것을 본 거령신(巨靈神)이 자비심을 일으켜 엄청난 힘으로 대화산을 쪼개서 화산(華山)과 수양산(首陽山)으로 갈라놓았답니다. 그러자 강물은 두 산 사이로 흘러 그 다음부터는 수해가 없어졌습니다. 이 때 거령신이 손을 들어 대화산을 갈라놓은 것은 폭력이 아니라 바로 자비의 발로였다는 얘기입니다. 선에서의 폭력은 이와 같이 임제가 정상좌의 칠통 같이 어두운 미망을 깨부수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과 같은 이치랍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정의를 위한 폭력이라도 그 폭력에 분노의 불길이 타오른다면 그 폭력은 부정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필자가 대학교 2학년 때 4·19 혁명이 터졌습니다. 처음에는 독재타도를 외치며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던 데모행렬이 곳곳에서 경찰들의 발포로 친구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나가자 선량했던 학생들이 마치 아수라처럼 변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학생들의 의거(義擧)로 독재정권은 무너졌지만, 이때의 의거라는 의로운 폭력은 과연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후 연이어 벌어진 군사혁명이라는 이름의 폭력들!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나요! 하기야 이기면 혁명이고 지면 역적이지요. 만일 4·19혁명이 성공 하였기에 망정이지 실패했다면 저의 운명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황벽의 발랄한 선기를 온전히 계승했으니/ 그 선기를 가진 임제가 어찌 점잖을 수 있으랴./ 거령신이 번쩍 손을 쳐들고 일격을 가하니/ 천만 겹의 대화산이 두 쪽이 났네」이 옛 선사의 송(頌)처럼 스승님의 삼십방(三十棒)을 맞더라도, 스승님의 고함에 귀가 멀어도 이 칠통 같이 어두운 중생 홀연대오(忽然大悟)나 한 번 해보았으면 소원이 없을 것인데, 이 중생 근기(根機)가 모자라 스승님의 일장(一掌)을 받고도 깨달음의 길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여의도교당, 원불교문인협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