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량계교 떨어진 무심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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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계교 떨어진 무심도인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9.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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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경식 교도의 틈새 선진열전 16 / 양산 김중묵 편

내가 양산 김중묵 교무님을 처음 뵌 것이 언제인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20대에 서울교당에서였던 것도 같고, 30초반 천안교당에서였던 듯싶기도 하고, 어쩌면 30대 종반 도봉교당에서가 맞는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러 차례 뵌 것이 맞고, 대개가 예전에 유행하던 교리강습 아니면 특별법회나 종재식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삭발한 머리에 체구가 깡마르고 이목구비는 잘고 야무져서 신경질적이고 날카롭게 보였다. 언뜻 뵙기에 그다지 덕 있게 보이지는 않고 재주는 있어 보이니 첫 인상인즉 중후함의 반대쪽, 죄송하지만 경박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대종사 님도 「너는 재주가 많고 경솔한 데가 있으니 모든 일에 자중하고 묵묵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야코를 죽이며 ‘무거울 중, 잠잠할 묵’ 중묵이라 법명을 주셨으리라.




내 기억으로 양산님의 강연·설법 주제는 늘 인과 법문이다. 인과설은 중생들이 착하게 살라고 방편 삼아 부처님이 하신 말씀일 뿐이라고 가볍게 입을 놀렸다가 대종사 아니면 정산 종사께 호된 꾸중을 듣고 이때부터 인과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인과진리 전도사로 변신했노란 사연을 덧붙이시기도 하였다.


양산님의 인과 법문은 흥미가 진진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그런 따위 뻔한 법문이 아니라 구수하게 풀어 가시는 다양한 예화가 일품이었다. 삼세인과를 직접 본 듯이 몸소 겪은 듯이 말씀하시는데 그 이야기를 넋 놓고 듣다보면 누구나 인과를 믿고 받아들이게끔 돼 있다. 그 예화라는 것이 불경 어느 구석에서 끄집어 낸 것 혹은 옛날 야담에서 가져온 것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지만, 조선대학교 설립자 박 아무개의 우여곡절 성공담이며 서울 아무데 사는 김 아무개의 기막힌 혼사 이야기 등 주로 실화를 가지고 자상하게 실감나게 엮어 가셨다. 몇 번을 들어도 그때마다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레퍼토리도 무궁하다. 그런 실화를 찾아 채록하는 수고도 일삼아 하였노라는 배경 설명도 따랐다. 전국 교당을 순회하며 아마 수백 차례나 이런 법문으로 법풍을 불렸으리라.




그런데 양산님에게는 종종 웃음을 자아내는 일화가 따라다녔다. 한복을 즐겨 입는 촌로답지 않게 테니스 같은 운동을 좋아하시는 건 그렇다 치고, 미국 다녀온 뒤론 노인네가 생뚱맞게 총부 구내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다니시더라든가, 노상 꾸벅꾸벅 졸기를 잘하시는데 한번은 익산서 임피로 결혼 주례를 서러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졸다가 군산까지 가셨고 되짚어 임피로 오는 길에 또 졸아서 익산까지 오셨고, 다시 되짚어 임피에 갔더니 이미 결혼식은 끝났더란다 하는 식이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인기 있는 일화는 건망증 관련이다. 남의 종재에서 설법하기로 한 약속을 까맣게 잊어먹어 담당교무랑 상주를 골탕먹였더라든가, 어느 해 모 교당에 가서 여러 날 묵으시며 강습을 났건만 거기 교무님이 겨우 두어 달 만에 찾아뵙는데도 “자네가 어디 교당에 있더라?” 했다든가 그런 식이다.




그래도 이 분이 당신 수행 일과를 철저히 관리하셨다든가, 어려운 동지와 이웃을 알뜰히 보살피셨다든가, 열반을 앞두고 동지나 후배에 대한 인사치레를 빠짐없이 하셨다든가 하는 식으로 반대되는 일면이 회자되기도 하니, 양산님은 두 얼굴의 법사였던가 모를 일이다.




나도 사연이 있다. 몇 차례 인사도 드리고 내가 교도회장으로도 있던 도봉교당에선 모시고 공양도 두어 번 하였건만 총부 와서 뵈면 항상 초면이다. 내 딴엔 그분을 친숙한 스승쯤으로 생각하건만, 정작 그분에게 나는 노상 생면부지 취급을 당하니 적잖이 서운했다.




열반 하시던 핸가 싶은데 신정절 어름에 총부에 왔다가 반백년기념관에서 법회를 보게 되었다. 원로님들이 돌아가며 연속적인 성리법회 설법을 하시는 중이라는데 마침 그날이 양산님 차례였다. 양산님은 법설에 앞서서 양해를 구했다. 당신이 위장병으로 새벽이면 특히 고통이 심하여 대중과 함께 좌선하지 못하니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병약한 원로로서 대중과 새벽 좌선까지 거르지 않고 함께 할 일은 아니다 싶은데도 자신이 후진들에게 수행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그 하심下心이 가슴에 각인되어 있던 것이다.


“법사님, 저 왔습니다.” 폐회 후 인사를 드리며 혹시나 하고 눈치를 살피니 역시나였다. “자네가 누구더라?” 하는 표정이 역력하시다. 얼른 “도봉교당 이경식입니다” 하니, 그제서야 겨우 알겠다는 듯이 “아, 개봉교당!” 하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셨다. 나는 정정해드리지 않고 열없게 웃기만 했다.


“시봉금 드린 적이 없지? 그러게 기억 못 하시는 거야.”


어떤 동지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귀띔을 한다. 그러고 보니 먹고 살기 바빠서 시봉금 한 번을 드린 적이 없다. 참 미안하다 싶어 다음번엔 약소하나마 시봉금을 챙기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던 끝에 마침 총부 갈 일이 생겨서 봉투 하나를 준비하여 갔다. 시봉금 안 드려서 나를 모른 척하셨으랴만 그래도 마음 내켰을 때 실천하자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차! 소식도 모르고 간 것이지만, 총부는 초상 중이었다. 양산님이 전날 새벽 열반에 드신 것이다. 준비해 간 봉투는 조의금이 되었다. 그 새를 못 기다리시다니 나는 영정 앞에 절하고 속으로 심통을 부렸다.


“종사님! 개봉 교당이 아니라 도봉 교당, 이경식이 시봉금 분명히 드렸습니다. 다음 생엔 시봉금 안 드렸다고 모른 체하거나 그러심 안 됩니다. 종사위씩이나 오르신 분이 돈 가지고 사람 차별하면 쓰간디요?”


스승이 몰라주고 동지가 몰라주고 그래서 섭섭할 때가 왜 없겠는가. 기왕이면 서로서로 챙겨주고 정을 나누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계교해서 될 일인가. 내가 가르침을 잘 받들면 그게 정통 제자지, 스승이 알아 줘야 좋아하고 못 챙기면 삐치는 제자라면 이건 짝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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