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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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재판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9.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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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야기로 만나는 선진



봄여름가을겨울 철마다 바쁜 논도 짚단 나가고 보리 밝을 때까지 그 며칠 비로소 휴가다. 그제서야 한껏 쪼그라든 몸을 살피며 보리 뿌리가 비집고 들어올 새살 밀어올리는 논. 그러니 사실 노는 것도 아니고 야무지게 다음 농사 준비하는 것일진대, 아이들은 정작 빈 논에 와서 자기네들이 정신 놓고 폴짝폴짝 노느라 야단이다. 논의 맨 얼굴 만나는 그 며칠 흙바닥을 구르고 찧으며 그야말로 ‘내가 논인지 논이 나인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서는, 저녁이 늦어서야 어미며 스승 불호령에 맴매맴매 끌려 귀가조치되는 것이다.


총부 어린이들도 밥 수저 놓기가 무섭게 빈 논으로 달려나갔다. 아침마다 눈 뜨면 조실 할아버지 문안부터 챙겨 총부 안에서도 칭찬이 자자했지만, 그래봤자 어린애는 어린애들이었다. 아침마다 누가 빨리 문안오나 경쟁하다가 새벽 세시에 대종사를 깨워 한바탕 꾸중까지 들었던 악동들 중에 광령(대종사의 차남)과 동오(동산 문정규의 손자), 팔로(혜산 전음광의 장남)가 있었다. 빈 논에서 놀다놀다 슬슬 지겹자 꾀를 냈다는 게, 쌓아 둔 짚더미에 불을 질러 어른들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는 ‘전형적인 불장난’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이 불은 금방 붙었고 어른들은 예상대로 허둥댔다. 또한 빈 논이었기에 힘 안들이고도 불길이 잡혔으며, 당연히도 범인들은 쉽게 잡혔다. 왜 이리도 쉽게 잡혀왔는지 모르는 것은 고 앙큼한 범인들 뿐이었다. 총부 어른들이 세 장난꾸러기들 볼을 꼬집으며 허허 웃었다.


“재판을 하세. 다들 공회당에 모이라 이르게.”


그런데 대종사의 반응이 의외였다. 빈 논 짚더미 하나 태웠기로서니, 그 꼬마들을 데리고 재판까지 한다는 것 아닌가. 불 끄려고 허둥대던 어른들이 빙 둘러앉은 가운데 세 범인이 무릎을 꿇었고, 대종사가 죄상을 보고하며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다.


“광령이는 이번 불장난의 주모자다. 성냥을 갖고 와서 동오와 팔로에게 불 놓자고 사주한 죄로 벌금 5원에 매 열 대를 맞는다.”


대중들을 비죽비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찾느라 혼이 났다. 아이들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는 중에, 다만 대종사는 사뭇 준엄한 표정이었다.


“동오는 광령이의 말을 듣고 직접 불을 지른 하수인이다. 벌금 2월 50전에 매 다섯 대를 맞는다.”


주모자와 하수인 다음으로는 망보는 이가 있었으니 나름 치밀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팔로가 판결을 받는다.


“팔로는 광령이와 동오가 불 놓는 것을 말리지 않고 그대로 보고만 있었던 죄로 벌금 1원 50전에 매 세대를 맞기로 한다.”


초지일관 근엄하고 진지한 대종사 모습에 이제 웃는 것은 아이들뿐이다. 빈 논 짚더미 하나라도 총부의 공적인 대상이며, 어린 아이라도 시비는 가려 이 회상의 법도나 재산에 흠을 냈으면 마땅한 벌칙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어떤 꾸중이든 친아들 광령이를 제일 앞세워 가장 많이 혼냄으로서 몸소 법도를 실천했다.


기상천외한 이 어린이 재판이 끝난뒤, 짚더미 값을 위해 벌금은 부모가 물고 매는 대종사가 직접 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조실 할아버지,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는 맹세까지 한 후 풀려난 아이들. 그러나 역시 예닐곱 천진난만한 얘들은 얘들인지라 또 ‘뭐 재밌는 일 없나’라며 두리번대다 종종 이런저런 말썽을 부렸다.



민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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