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지불공과 진리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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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지불공과 진리불공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4.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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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9

우리가 믿고 수행하는 원불교 교법은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의 뼈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적 신앙의 귀결(歸結)로써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있고, 사실적 훈련의 정점(頂點)에는 무시선 무처선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사은 당처에 직접 불공하는 ‘실지불공’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이는 과거 미신적이고 비(非)진리적이던 잘못된 신앙을 과학적이며 진리적으로 돌려놓은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리 안에는 실지불공과 아울러 또 하나의 가르침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진리불공’입니다. 진리불공은 진리(법신불)를 향해서 드리는 불공으로써, 대종경 교의품 제16장에는 그 방법에 대해서 ‘몸과 마음을 재계(齋戒)하고 법신불을 향하여 각기 소원을 세운 후 일체 사념을 제거하고, 선정(禪定)에 들거나, 또는 염불과 송경을 하거나, 또는 주문 등을 외어 일심으로 정성을 올리는 것’이라고 설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대종사님 법문에서, 삿된 생각을 모두 끊고 ‘선정에 드는 것’이 실제로 어떻게 ‘법신불께 올리는 진리불공’이 되는 것일까요? 그 까닭은 바로 이렇습니다. 법신불은 바로 일원(一圓)이며 일원은 곧 일체중생의 본성(本性)이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품자리에 머물면 그것이 곧 법신불과 함께 있는 것으로써, 그 성품자리에 머무는 것이 곧 선정에 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온갖 사량(思量)과 분별주착을 떠나서 고요한 것을 선정이라고 하며, 이러한 마음자리가 다름 아닌 우리의 성품(본성)이요 또한 청정법신불이니, 어느 경계에서든 마음이 이 자리에 머물면 곧 ‘진리불공’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사량과 분별주착을 내려놓고 텅 빈 마음이 되어 자기 앞에 놓인 일을 하게 되면, 일마다 사심(邪心)이 나지 않으며, 저절로 성품에서 발하는 두렷한 공적영지(空寂靈知)와 오롯한 정성으로 일을 하게 되어, 그 행위 자체가 진리 속에서 행하는 ‘사사불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그 일의 결과가 저 법신불 일원상의 뜻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위와 같이 일체의 사념을 끊고 선정에 드는 것뿐 아니라, 염불을 하거나 송경(誦經)을 하거나 주문을 외우는 것도 또한 ‘사량과 분별주착이 끊어진’ 자신의 성품자리에 드는 것으로써, 대종사께서는 이 모두가 다 청정법신불 일원상에게 불공을 올리는 진리불공이라고 위 법문에서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은 당처에 직접 불공하는 ‘실지불공’에 있어서나 ‘진리불공’에 있어서나, 그 가운데 핵심은 바로 ‘두렷하고 텅 빈 마음’으로 행하는 것으로써, 이는 위 두 불공법이 사실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만약 이러한 불공의 요지를 살피지 못하고 실지불공과 진리불공을 서로 다르게 생각한다면, 참다운 불공의 의미에도 어긋날뿐더러 불법과 현실이 서로 따로따로인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진리적이고 사실적이며 또한 과학적인 우리 교법을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닦는 주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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