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님의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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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님의 근심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6.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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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17

「내가 이 회상을 연지 이십 팔년에 법을 너무 해석적으로만 설하여 준 관계로 상근기는 염려 없으나, 중·하 근기는 쉽게 알고 구미호(九尾狐)가 되어 참 도를 얻기 어렵게 된 듯하니 이것이 실로 걱정되는 바라, 이 후부터는 일반적으로 해석에만 치우치지 말고 삼학을 병진하는 데에 노력하도록 하여야 하리라.」(대종경 부촉품 9장)



위 법문을 대하면 색다른 느낌이 납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 퍽 후회하시는 듯한 말씀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대종사께서는 대각하신 뒤부터 열반에 드실 때까지 28년이라는 세월을 수많은 가르침과 대기대용(大機大用)으로써 미욱한 중생들을 제도하시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이르러 뜻밖에도 위와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위 법문을 살펴볼 때 대종사께서는, 중하근기의 제자들이 깊은 수행 없이 대략적인 지식만으로 불법을 이미 터득한 듯 여김으로써, 일원의 참된 진리를 깨치기가 되레 어려워진 듯하다고 근심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께서 「불법을 너무 해석적으로만」 설해주셨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드셨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제자들에게 불법(진리)을 ‘자세하고 쉽게 해석해 주신’ 데 대한 스승님의 걱정입니다. 우리가 흔히 표현해온 것처럼 ‘마치 입에 넣어주듯이’ 상세하게 법을 풀어서 가르쳐주신 뜻은, 배우지 못한 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누구나 신앙과 수행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뜻을 다수의 (중하근기) 제자들이 적잖이 오해하여, 깊은 수행정진 없이도 불법의 참뜻을 깨달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여우같은 분별로 쉽게 헤아려서 ‘이젠 진리를 알겠노라’ 함으로써, 더 이상 공부에 힘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불법의 지극한 이치는 이른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어서 수도인이 깊은 수행정진을 통해 그 자리를 오득(悟得)하는 것이라, 스승이 말과 글로 내려주는 가르침은 그 자리로 향하게 하기 위한 부득이한 방편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를 간과한 채 제자들이 법을 해석하는 데만 치중하고 되레 수행은 게을리 하여 일원의 진리를 참으로 깨치는 이가 드물어진다면, 이는 결코 대종사께서 바라셨던 본의가 아니며 올바른 제자일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그러므로 불법을 온전하고 바르게 닦기 위해서는 ‘삼학을 병진’하는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반을 앞두신 대종사께선 이 점을 우리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셨습니다. 즉, 삼학병진의 공부는 제자들을 위한 대종사님의 마지막 부촉이며 이는 해탈성불의 열쇠로서, 우리경전엔 이보다 더 빠른 길은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삼학병진이란 곧 정전에 있는 ‘무시선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대종사께서 근심하셨던 바가 무엇인지를 기억하고 간곡히 당부하신 ‘삼학병진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며, 이것이 위대한 스승님을 향한 진정한 예경(禮敬)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제자들이 이 위대한 교법을 증명함으로써 우리 일원교화의 나무에 한없는 열매가 열려서, 소태산대종사님의 큰 뜻이 온 세상에 실현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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