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선법 - 정의와 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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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선법 - 정의와 불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7.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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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22

육근(六根)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


위 말씀은 무시선법의 끝에 나오는 ‘무시선의 강령’입니다. 이 내용은 표현이 매우 간단하지만 자칫 잘못 해석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위 강령에서 ‘일심’과 ‘정의’ ‘불의’라는 용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뜻과는 다르기 때문에 잘 새겨보아야 합니다.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59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망념이 끊어지면 천진이 나타나나니, 이렇게 ‘일심’이 되면 낙원이 무궁하리라.」 또한 경의편 36장에는 「항상 일원의 체성을 체받아서 ‘일심’ 즉 선(禪)을 잘 닦으라」는 표현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경의편 30장에서는, 「무시선의 강령 중 ‘일심과 정의’의 관계는 어떠하오며 ‘잡념과 불의’의 관계는 어떠하나이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일심이 동하면 ‘정의’가 되고, 잡념이 동하면 ‘불의’가 되나니라.」하고 답하시는 정산종사님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심(一心)은 ‘어느 한 경계에 오롯이 집중하는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일체의 망념과 분별주착이 끊어져서 ‘마음이 텅 비고[空] 두렷한[圓]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정의(正義)란 위와 같은 ‘일심’으로 육근을 작용한 행위를 말하며, 불의(不義)는 망념과 분별주착으로써 육근을 작용한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눈앞에 어떤 일이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내가 이것에 온통 마음이 붙잡혀서 일을 하게 되면 흔히 삿된 욕심이 따라붙어서 오직 ‘자기’만을 위한 취사(取捨)가 되기 쉽습니다. 이것을 두고 경계[일]를 대하여 분별과 주착으로써 행(行)하였다고 합니다. 이 경우, 혹 그 행위의 결과가 좋게 나온다하더라도 그것은 참되고 바른 진리(眞理)의 행이 아니라, 욕심과 집착으로 이루어진 중생의 업(業)입니다. 무시선법에서는 이것이 곧 불의(不義)입니다.


그런데 내가 눈앞의 일을 할 때 안으로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을 지켜서 일체의 잡념을 내지 않고, 밖으로 경계[일]에 사로잡히지 않고 분별과 주착을 내려놓아서 저절로 두렷이 떠오르는 공적영지를 좇아 일을 하면, 이것이 내 성품의 공원정(空圓正)으로 육근을 작용한 것으로써, 일체의 시비선악을 초월한 참되고 바른 진리의 행입니다. 무시선법에서는 이것이 곧 정의(正義)입니다.


그러므로 위 무시선의 강령을 풀어서 다시 써본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일이 없을 때는 모든 잡념을 제거하고 분별주착을 쉬어서 텅 비고 고요한 마음을 지니기에 힘쓰며, 일이 있을 때는 경계에 끌려서 사심잡념으로 행하지 말고, 모든 분별주착을 놓고 텅 비고 고요한 가운데 두렷이 떠오르는 공적영지를 좇아서 육근을 작용하기에 힘쓰라.”


이처럼 모든 경계에서 우리 자성의 원리(空圓正: 정혜계)를 쓰는 것이 곧 삼학병진이며, 경계에 응하여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천만 경계 중에서 동하지 않는 행을 닦는” 무시선 대법(大法)입니다. 누구든 이렇게 공부하면 염려하지 않아도 저절로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공적영지의 자성에 부합”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소태산대종사께서 직업과 처소(處所)와 동정(動靜)에 관계없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니, 이렇게 위대한 무시선법을 놓고 또 어디 가서 불보살로 가는 길을 묻겠습니까?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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