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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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08.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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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24

양무제(梁武帝)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如何是聖諦第一義”


달마대사가 대답했다.


“확 트여 있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廓然無聖”


양무제가 다시 물었다.


“나와 마주한 자는 누구요? 對朕者誰”


달마대사가 말했다.


“모릅니다. 不識”


흔히 하는 말로 ‘한(限)이 맺힌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뜻대로 할 수 없어서 가슴에 처절한 응어리가 졌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처럼, 누군가에게 심히 억울한 대우를 받아서 복수심에 불탄다거나, 어린 시절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했던 설움이라거나, 자식의 신체장애가 평생 가슴 아픈 부모가 그러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바람[願]이 있습니다. 이 원(願)이 작다면 그냥 ‘바람’이고, 더 크다면 ‘갈망’ 또는 ‘소원’이며, 만약 그보다 훨씬 더 크다면 ‘한(恨)’이라고 할 것입니다. 복수에 한이 맺혔거나 가난에 한이 맺혔거나, 그것은 어쩌면 감정상의 문제로써, 마음이 풀어져서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되면 그냥 있는 그대로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도 아니고 탐욕도 아닌데, 버리지도 못하고 끊을 수도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도인(求道人)이 갖는 진리에 대한 의문입니다. 이것은 그저 한(恨)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한(恨)이 있어야 구도자라고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형체가 있는 것치고 이루어졌다가 흩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광물과 생물체가 그렇고 우리의 몸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몸은 지수화풍으로 흩어지지만, 형체도 없으면서 이 몸을 좌지우지했던 그 ‘무엇’은 대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냥 우연히 왔다 가는 거라면, 사람이 서로 다른 모습과 성격으로 태어나서 저마다 다른 재주와 업보로 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위에 있는 달마대사의 대답을 어떤 이들은 ‘법신불일원상’이라 재빨리 알고, 이것은 언어도단이니 “모른다”고 답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화두가 다 풀려서 기분이 홀가분하고 후련해야 될 텐데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 그건 옳은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몸을 끌고 다니는 진정한 ‘나’를 모른다면, 그 삶 자체가 퍽 허망한 것입니다. 가령 화를 내거나 슬퍼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누가’ 그렇게 시키는 줄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몸이 그렇게 시키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이 몸 아닌 마음이 그런 줄 안다 해도 정작 그 정체를 알지 못하니, 한평생 온갖 희로애락의 경계에 홀려서 그저 넋을 잃고 헤매다가 일생을 마칩니다.


사람이 자기의 참 주인이 되려면, 자기 안의 이름도 모습도 없는 ‘그것’의 실체를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마침내 그것의 얼굴을 똑똑히 보고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법을 만나서 이 회상에 참여한 이는 모름지기 구도(求道)에 한(恨)을 품어야 합니다.


그저 부귀하게 이 한평생을 보내려고만 하면 실은 가엾은 삶입니다. 큰 재벌도 몇 년 사이에 망할 수 있고 대통령도 임기가 있듯이, 지금 재색명리를 다 갖추었어도 내생을 완전히 기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너는 누구냐?” 라는 물음은 진리를 깨치게 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살리는 물음입니다. 이번 휴가 때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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