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지저지도 , - 조주가 '그렇다, 다만 지도무난'이라고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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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지저지도 , - 조주가 '그렇다, 다만 지도무난'이라고 말하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11.11.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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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덕권 교도의 청한심성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는 말이 연 3회에 걸쳐 나옵니다. 그만큼 중요한 화두라는 것이겠죠. 여기서 납승은 언어란 분별을 일으키는 도구이므로 지극한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분별과 간택을 버려야 하는 것인데, 화상의 이 말씀도 결국은 분별과 간택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조주의 답변은 아주 명쾌합니다. ‘그러니까 간택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주의 대답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조주 화상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실천입니다. 도에 이르는 길을 백번 알아봤자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한낱 겉만 번지르르 한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원불교전서를 세상에서는 ‘만고희유(萬古稀有)의 대법보(大法寶)’라고 합니다. 이 전서 안에 진리가 있고 도덕이 있으며, 인생의 도리가 무궁무진하게 갊아 있어 성현이 가신 다음에는 도가 경전에 있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전서에 담겨있는 일원대도를 얼마나 실천에 옮기고 있을까요? 그 한 예로 ‘시방일가 사생일신’이라고 하셨는데 우리 인간들 마음엔 인종을 차별하고, 빈부를 차별하며, 유무식의 차별이 행해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일 것입니다. 중도(中途)가 도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마침내 거리로 뛰쳐나와 완전히 대화가 실종된 저간의 정치현실입니다.


중도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회색지대가 아닙니다. 양극단을 아우르고 전체를 살피는 진정한 상생상화의 길인 것입니다. 그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고 도덕정치의 본 모습일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보수라 하더라도 진보의 진취적인 점은 취해야 하고, 진보라 하더라도 보수의 건전성은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상생상화 중도정치의 첫 걸음이 아닐 런지요?


우리 원불교 소태산 새 부처님께서 평등사상에 입각해 개교당시부터 “재가와 출가는 구분은 할지언정 차별은 하지 아니하고, 다만 공부실력에 따라 대우한다”는 제도를 짜 놓으신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교단이 관료화됨에 따라 조직이 유연하지 못하고 어느덧 재가 교도들을 차별하고 출가들이 재가위에 군림한다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또 어느 유명대학의 교수님이 원광지에 충고하신 칼럼에, “원불교 교단 안에서 보이는 재가와 출가사이의 권위주의, 또 성직자간의 위계질서에서 오는 권위주의의 폐해는 큰 문제다”라고 진단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직자는 중생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새 부처님의 본의를 망각한 무심의 소치가 아닌가요?


아무리 높고 단단한 댐도 작은 구멍으로부터 물이 새 결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새 부처님의 가르침, 일원대도 그대로만 실천에 옮기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지요? 다 간택에 사로잡힌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혐간택’, 즉 간택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조주 화상의 말씀은 지당하고 또 지당한 말씀입니다.


설두(雪竇) 화상께서 송(頌)하시기를 ‘물도 안 묻고 바람도 스며들지 못하니/ 범과 용이 달리고 귀신들이 울부짖는다/ 머리가 세 척인 줄 뉘라서 알리요/ 마주한 채 말없이 외발로 서 있도다.’ 하셨습니다. 그 어떤 진리라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면 도에 이르기는 천리만리나 멀어질 것입니다. 이 진리의 실천을 위하여 그 옛날 정혜결사(定慧結社)와 같은 ‘원불교 결사운동’이라도 전개하면 어떨까요?



원불교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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