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만과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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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만과 겸손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4.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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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57

정권의 민간인사찰 문건을 둘러싸고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선거 때는 국민을 섬기겠다고 몸을 낮추지만 권력을 쥐고 나서 오만해지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이란 게 권좌에 오른 뒤엔 겸손하기가 정말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일본 게이츄(契沖: 1640~1701) 선사가 동복사(同福寺)에 있을 때 하루는 교토(京都)의 지사(知事)가 찾아왔다. 지사의 수행원이 안으로 가서 선사에게 지사의 명함을 건넸다. 거기엔 ‘교토지사 기타가키(北垣)’라고 쓰여 있었다. 명함을 받아든 선사는 수행원에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높은 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그러니 그만 돌아가시라고 전해주시오.”


수행원이 돌아가서 그대로 고하자, 지사가 말했다.


“내가 실수를 했구나! 자, 이 명함을 다시 갖다 드려라.”


지사는 자기의 명함 위에서 ‘지사(知事)’라는 직함을 지우고 다시 선사에게 보냈다.


그 명함을 본 게이츄 선사가 그제야 큰 소리로 말했다.


“아, 기타가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어서 드시라고 해주시오.”


우리는 대체로 무엇이든 자기가 남보다 앞선다 싶으면 아만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한 어려서부터 겸손해야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만약 겸손하지 않다면 그가 아무리 뛰어나도 ‘인격이 부족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속이 깊은 사람들은 자기가 비록 남보다 낫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오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아만심은 내버려두면 점점 더 커져서 나중엔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겸손’이라는 틀 속에 자신을 가두려합니다. 헌데 밖으로 자기 마음을 숨기기 때문에, 마음과 태도가 이중적(二重的)이 되어서 자책감을 떨치진 못하지요. 이른바 ‘착하고 훌륭한’ 인간상(人間像)에 대한 딜레마입니다. 이런 경우 어찌해야 할까요.


만약 진리를 바탕으로 수행하려는 이라면 결코 ‘겸손하려고’ 애쓰지 말아야합니다. 사실, ‘겸손’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또 하나의 힘겨운 아상(我相)입니다. 때문에 분별상[我慢]을 없애고자 또 다른 분별심을 낸다면 그 싸움은 결코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갈등이 끝이 없습니다. 그리되면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아만심을 결국 자기 안에 감춘 채 평생을 지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숨겨져 있을 뿐이라, 남이 안보면 언제든 고개를 쳐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아만심의 해결은, 아상(我相)이 일어나는 그 마음 - 즉 자기의 장점에 대한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남에게 일부러 겸손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겸손해 보이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마음은 자타(自他)에 대한 높고 낮음[貴賤]과 좋고 싫음[好惡]을 떠나있기 때문에, 자기를 자유롭게 하면서도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만을 해결하는 올바른 길로써, 빈 마음으로 분별을 쳐내는, 무(無)로써 유(有)를 이기는 법입니다.


안으로 아만심이 솟는 것을 느끼면 그냥 그 ‘분별’을 딱 쉬어서 잠깐이라도 빈 마음이 되어보세요. 그러면 좋고 나쁘다는 생각에 가려있던 자기의 본래마음이 저절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진리에 바탕한 마음공부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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