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 곧 교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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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이 곧 교화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06.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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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66

「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 몸은 그 어떠한 몸인가?」<의두요목>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니라(子曰 朝聞道 夕死可矣)」《논어》



인간에게는 아마도 다른 동물에겐 없을 의문이 많습니다. 왜 사는가?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의문은 배움이 많거나 적거나,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를 막론하고 삶의 본질적 가치를 찾는 사람들에게 많습니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 특별히 더욱 끌리게 되면 철학자나 구도자(求道者)가 되거나 출가수행자가 되겠지요. 헌데 이 질문의 해결은 사람의 앎[지식]과 지능에 달린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끝없는 집념에 달려있습니다. 이 질문을 정신적으로 깊이 찾아들면 바로 진리의 세계와 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밥을 먹고 살면서도 “왜 사는가?”를 모르면 퍽 우스운 일입니다. 그냥 ‘살아야하니까’ 산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굳이 다를 게 무엇이며, 게다가 좀 더 오래 살아보겠다고 그토록 발버둥 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래서 이 “왜 사는가?”를 생각하다보면 “삶이란 무엇인가?”로 발전하고, 그러다 “이런 나는 누구인가?”로 나아가, 끝내는 “이렇게 묻는 자는 무엇인가? (是甚ꠙ ꠓ: 이뭣고)”라는 의문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삶의 원초적인 의문이 저절로 화두가 되고, 깊은 구도(求道)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이 화두가 풀리면 참나, 즉 진리를 깨치게 되지요.


사람은 자기의 근본(참나, 진리)을 추구하려 애쓰면 곧 구도자 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졌다면 설령 집을 떠나지 않았어도 출가수행자라 할 만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심출가(心出家)’라는 말이 있지요. 그리고 이미 출가를 했다면 “내가 누구인가?”를 밝혀야만 비로소 출가한 보람이 있습니다. 전장에서 적진을 함락시키는 것이 군인의 임무이듯, 수행자는 자기의 본래면목[本性]을 깨쳐야 출가의 뜻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야 불법을 바르게 닦고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지요. 운전사라면 차를 모르고서야 어찌 운전해서 목적지로 갈 수 있겠습니까.


공자님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진리[참나]에 대한 갈망이 이쯤 되어야 실로 ‘출가수행자’라 할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이런 집념이 유가(儒家)에서 숱한 사상가를 탄생시켰고 불가(佛家)에서 많은 조사를 배출했으며, 부처님과 공자님의 제자가 끝없이 나오게 된 것이지요. 성인의 가르침은 세상에 저절로 퍼지는 게 아니라, 그 법을 깨닫고 수행하는 이들이 계속 많이 나와서 세상에 자꾸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최근 조계종 고위직 승려들의 매우 세속적인 모습이 알려진 뒤, 지난 석탄절에 조계사 봉축법요식을 찾은 신도들의 수가 작년에 비해 3분의 1이나 줄었다고 합니다. 석탄절을 맞아 포교가 잘 되기는커녕 되려 있는 신도들마저 내쫓은 꼴이 되었습니다. 출가자의 수행은 자기만을 위한 게 아니라 많은 대중들을 무의식중에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끌어들이는 힘입니다. 무서운 결심으로 출가한 분들이 수행을 안 하면 대중들이 수행할 마음을 낼 리가 없고, 그러면 성인의 가르침이 퍼져나갈 리 없습니다. 때문에 수행은 곧 교화입니다.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 “저 일원상은 무엇인가?”


자기 안의 법신(일원상)을 찾지 못하면 뭇사람들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교화는 교화로써만 되지 않습니다. 신앙만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교화의 바른 길은 수행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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