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풍아 교당 (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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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풍아 교당 (1999 ~ )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11.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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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프리카의 어머니 김혜심 교무, "시아봉가, 꼬레아!" 22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레토리아 북부에서 교당 현판을 내걸고 교화를 하던 중, 3년 만에 이민국으로부터 쫓겨난 바 있는 아프리카의 첫 교당. 프레토리아 교당의 어쩔 수 없는 좌절은 김혜심 교무에게 세계교화에의 더 큰 의지를 남겼다. 1999년 스와지랜드 까풍아에 교실 두칸으로 원광유치원과 동시에 ‘까풍아교당’도 함께 문을 열었다. 한국인은 커녕 외국인도 처음 본 오지였으니, 원불교의 ‘원’ 자가 무언지 알 턱 없는 오지 까풍아. 그러기에 만리장성을 쌓 듯, 머나먼 미래를 위해 작은 씨앗 하나를 떨어뜨린 셈이었다.


“스와지랜드 전체를 통틀어 한국 교민 가정이 딱 일곱집이었어요. 다행히 고흥교당 출신의 박원봉 교도 가족이 계셨지만, 대부분 원불교를 모르거나 다른 종교였죠. 그러니 초창기엔 교화라기보다는 한국 사람들끼리 의지하고 연대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까풍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어떡하면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할까, 하는 일념으로 살아온 몇 년이 흐른 2004년, 까풍아교당의 현지 청소년과 가족들이 법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밥 한 끼를 먹으러 오기도 하고, 교무들을 보러 오기도 하며, 대부분은 딱히 할 일이 없어 놀러오는 셈치고 찾아왔던 까풍아 사람들.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 없어 문맹도 많은 이들에게 원불교의 교법과 진리의 이치를 알려주는 것은 참으로 멀고 험난한 길이었지만, 그래도 줄곧 일요법회에 나와 더듬더듬 일원상서원문도 외우고 성가도 따라부르는 이들이 기특해, 교무들은 더욱 쉽고 재밌게 교법을 전하려 늘 궁리를 거듭했다.


무엇을 해주고 나면 다음부터는 당연히 받는 것으로 아는 까풍아 주민들의 생각은 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고, 그 마저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잘 이루어지지 않는 데 비롯된 것이었다.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서도 교육이 필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바르게 살기’ 위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김혜심 교무는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에서의 경계에 대처하는 마음공부를 앞세워 현지교화를 펼치고 있다. 이웃의 누가 물을 더 썼다거나, 학교 친구 누가 밉다거나 하는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로 배우는 마음공부로 인해, 까풍아 전체적인 분위기까지도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교민 교도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까풍아교당은 2009년부터 현지 가족들 중심의 법회로 변화했다. 스와지랜드 언어로 설명해 주는 법문과 설법, 예식 순서도 현지 가족들의 문화에 기반해 준비되고 또 거듭 수정됐다. 이 훈풍이 계속되어 2010년 8월 13일, 까풍아교당 최초의 입교식이 열려 13명의 까풍아 사람들이 새로운 이름으로 이 회상의 도반이 되었다. 지은이, 사은이 등 새 이름을 받은 교도들은 발음을 어려워하면서도 새로운 이름을 즐겨 부르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듬해 5월 21일, 한울안운동의 제과제빵센터 개원식에 참석한 전 종법사 좌산 이광정 상사가 22일 법회에 참석해 현지 교도들을 격려하며 일일이 염주를 선물해 주었다.


현재 20~30명의 교도들이 일요법회를 통해 원불교 교법도 배우고, 마음공부도 하는 스와지랜드 까풍아교당.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영주도 청정주도 곧잘 외우고, 다 외웠다 싶으면 쭈볏쭈볏 김혜심 교무에게 자랑하려 기회를 보는 현지 교도들. 자신들에게 해주는 일들이 그저 착한 마음에서만이 아닌, 주고 받는 이치, 짓고 갚는 이치임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이 까풍아 첫 현지 교도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는 기도가 김혜심 교무의 하루 마지막 일과다.


민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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