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도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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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도끼에
  • 한울안신문
  • 승인 2012.11.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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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89

날마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달되는 뉴스를 보면 뜻밖의 사건도 많습니다. 축제 중에 환상적인 에어쇼를 펼치던 전투기가 관중들 앞에서 추락하는 경우도 있고, 세계적인 기업이 경영진의 판단 잘못으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경우도 있으며, 이른바 황혼이혼이라는, 한평생 말없이 고통을 감내하던 배우자가 노년에 이르러 이혼소송을 내는 일도 있습니다.


이래서 세상 일이란 막연히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가 쉽지 않은데, 이것은 우주자연의 질서나 인간사회의 부침(浮沈)이나 다 인과(因果)의 법칙을 털끝만큼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살면서 무엇인가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갑자기 그것이 무너졌을 때의 느낌은 참 허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곧잘 우리는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정말 믿어도 될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믿어도 되는가?’라는 의문은 어쩌면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평생을 바쳐 진리를 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선 더욱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들 교인들에게 철저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처음 교조(敎祖)가 그 가르침이 진실임을 강조하고 이를 따르게 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데서 시작되는 거지요. 그런데 나중에 제자 스스로가 그 가르침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더는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아직 사실여부를 확인 못했을 때 쓰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예로부터 선종의 조사(祖師)들도 도를 이루기 위해선 신(信)과 분(憤)과 의(疑)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신(信)은 경전이나 스승의 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부처’라는 근본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경전과 스승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만 요구한다면, 그것은 신(神)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주장하는 서양종교나, 교주(敎主)를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사이비종단과 사실상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自燈明]’는 부처님의 최후설법에 따라, 밖으로 언어문자를 좇아서는 결코 진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게 철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믿고 그 말을 믿어준다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요. 더구나 중생이 성현의 말과 가르침을 그대로 믿는 것은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부처님과 성인들의 가르침은 다 자신의 본성을 깨달음에서 나온 말로써, 그분들 스스로도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을 공부해서 지식으로써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마음으로 파고들어서 그 속에서 진리를 깨달아야지 언어문자로 등불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불자가 자기의 마음이 아닌 다른 길을 좇아 진리를 찾고 깨달음을 구하면, 불법(佛法)의 근원에서 보자면 불신자(不信者)입니다. 이는 물고기를 잡으려고 도리어 물 밖으로 나오는 사람과 같아서 자기가 자기 발등을 찍는 격이지요. 그래서 옛 조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 배우는 이들아! 내 말을 곧이듣지 말라. 왜냐하면 근거 없는 말들이니, 잠시 허공에 그림을 그려놓고 그 모양에다가 색을 칠한 것과 같으니라. (道流 莫取山僧說處. 何故 說無憑據 一期間圖畵虛空 如彩畵像等喩.)”《임제선사》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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