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의 은혜와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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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은의 은혜와 폭력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13.09.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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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길튼 교무의 정전산책 9 / 방길튼 교무

사람 성격을 이해해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듯이 사은(四恩)을 느끼는 관점에 따라 은혜의 내용에도 확연한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즉 ‘목가적이고 유토피아적으로 이해할 것인지’ ‘삶이란 고통의 다른 의미로 이해할 것인지’에 따라 은혜의 성격은 달라질 것입니다.



보은과 최소한의 폭력


프랑스 현대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비폭력’이 아니라 ‘최소한의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계문의 “연고 없이 살생을 말며” “연고 없이 사육을 먹지 말며”의 진정한 뜻은 바로 최소한의 폭력일 것입니다. 비폭력은 슬로건은 될 수 있어도 진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체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먹는 것이고 그것은 무엇인가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무엇인가의 죽음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다른 존재의 신체와 노고 그리고 공급을 받아야만 됩니다. 남편은 아내의 도움을 자녀는 부모의 도움을 인간은 식물과 동물의 도움을 더 나아가 천지의 도움을 받아야만 됩니다.


그런데 도움의 본질은 착취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착취자라는 인식이 기본입니다. 이런 인식이 전제될 때 진정으로 우리는 피은된 존재라는 은혜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知恩). 채식을 권하는 것은 이것이 생태계에 최소한의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육식은 생태계의 폭력을 중첩시킵니다. 또한 음식을 남기지 않고 먹는다는 것은 이 음식만으로 다른 폭력을 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배고프다고 간식을 먹는 폭력을 삼가겠다는 의지입니다. 아나바다 운동도 최소한의 폭력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말씀처럼 ‘하늘이 하늘을 먹는(以天食天)’것입니다. 부처가 부처를 먹기 때문에 최소한의 폭력으로 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최대한 폭력을 줄이겠다는 것이 바로 보은(報恩)입니다.



피은과 자족할 수 없는 존재


우리는 자족(自足)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의존해야만 되는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입니다. 다른 존재로부터 영양을 공급 받아야만 되는 육체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자족할 수 없습니다. 타인도 내 마음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나도 타인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자족적일 수 없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다만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사이일 뿐입니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타인의 존재와 관심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知恩). 원래 외로운데 함께 해주고 공감해주니 고마운 것입니다. 안 도와줘도 당연한 것인데 도와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내가 손 내밀 때 상대가 잡아주어야 악수가 되고, 상대가 손 내밀 때만 나는 그 손을 잡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나와 타자는 비대칭적 관계입니다. 내가 외롭기 때문에 타자의 존재가 비대칭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대칭 속에서 타자는 은혜입니다.


나 스스로 자족할 수 있고 스스로 혼자 행복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 타인의 관심과 호의는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입니다. 내가 자족적일 수 없는데 함께 있어주고 손 내밀어 주니 너무도 고마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피은(被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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