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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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 형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3.09.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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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알콩달콩 생명이야기 / 맹주형 , (천주교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교육기획실장)

가을입니다. 수년 전 가을이었지요. 저와 아내, 아이들과 함께 황매산 산골 기슭에 사는 정홍 형님 집에 갔었습니다.


정홍 형님은 가톨릭농민회에서 생명ㆍ공동체운동을 하다가 수년전에 귀농한 농부 시인입니다. 마을 앞에서 우리 식구를 맞은 형님은 마을 길 따라 걸어가며 마을 이야기를 해주고, 장대로 아이들과 감도 함께 땄습니다. 어느새 중·고등학생 청소년이 된 아이들은 지금도 가끔 제게 형님 집 앞에서 감 따던 이야기를 합니다.


부모가 하는 흔한 잔소리보다 산골 사는 형님의 이야기가 더 감동이었던 게죠. 큰 아이는 그 인연으로 홈스쿨링 할 때 형님네 밑 빈 집에서 혼자 불 떼며 일주일 남짓 낮에는 밭일 돕고, 비 오면 형님과 글쓰기하며 지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혼자 버스 타고 집에 돌아온 큰 아이 가방에는 형님과 농민들이 챙겨준 효소와 칡차가 들어 있었고, 큰 아이는 “이제 라면과 고기는 먹지 않을 테니 채소와 잡곡밥만 해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아내와 제가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구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부모가 백날 이야기해도 잘 안 되는 일을 땅과 농부가 가르쳐주었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제게 형님이 책 한 권을 보내주었습니다. ‘나는 못난이’란 동시집입니다. 따뜻한 그림과 형님 닮은 동시들이 가득합니다. 제가 먼저 보고 요즘 공부하기도 싫고, 학교도 재미없어 하는 둘째에게 읽어보라 책을 건네주었죠. “전에 너랑 같이 감 땄던 정홍 아저씨 책이니 한 번 읽어봐.”하며 건네주는데 어찌된 일인지 군소리 없이 책을 받아듭니다. 매일매일 바삐 살아가는 불량 아빠인지라 아직 둘째의 독후감을 듣진 못했지만, 둘째는 분명 지난 가을날의 그 기억으로 책을 읽었을 겁니다.


정홍 형님은 말합니다. “저는 자연 속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도시에서 살 때는 하늘과 땅이, 도시와 농촌이, 사람과 자연이 하나라는 단순한 진리조차 깊이 깨닫지 못했는데, 자연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저절로 깨달았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하나이며, 서로 나누고 섬기며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아마 제 아이들도 수년 전 황매산 산골에서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형님한테 이런 마음을 배웠을 겁니다.


날이 갈수록 ‘환경적인 인간’보다는 ‘능력 있는 인간’을 강요하는 오늘날 삐뚤어진 공교육 속에서 힘들어하고 버거워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은 형님 집 위에 있는 찬 우물물 같은 시원함을 줍니다. 나를 대신해 희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농민들과 이웃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누가 나 대신 / 들녘에서 땅을 갈고 있습니다. / 누가 나 대신 / 공장에서 옷을 만들고 있습니다. / 누가 나 대신 땡볕에서 집을 짓고 있습니다. //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 날마다 구수한 밥을 먹고 / 날마다 따뜻한 옷을 입고 / 날마다 편안하게 잠을 잡니다. // 나는 ‘누가’ 없으면 / 아무것도 아닙니다.”(서정홍 시, ‘누가 없으면’ 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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