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과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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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과 자비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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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길튼 교무의 정전산책 17

대종사님은 『정전』에서 신앙의 핵심방법으로 「보은」을 천명하고 계십니다. 『대종경』에서는 보은과 자비를 상황에 따라 병행해서 사용하나, 『정전』에서는 「보은」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정전』은 원점과 같습니다. 이 원점을 기준으로 모든 척도가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왜 자비라 하지 않고 보은이라 했을까? 우리는 이를 의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자비와 보은의 차이


자비에는 시혜적 요소가 있습니다. 내가 높고 너는 낮은 상태입니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높은 저수지에서 낮은 논에 물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아량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 자비에는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없는 사람의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수준차가 있는 것으로, 어찌 보면 암묵적으로 계급의식을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비의 의도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인격적 능력을 발휘하여 능력이 없는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잘 대하라는 지도자적 의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보은에는 이런 계급의식이 없습니다. 서로 서로 보은의 대상일 뿐입니다. 은혜를 입었기에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피은(被恩)에는 평등이 바탕 되어 있습니다. 능력의 유무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갚느냐 안 갚느냐는 당위의 문제가 선제합니다.


이 보은의 차원에서는 시혜성(施惠性)이 없습니다. 소유의식도 근본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잠시 위임받아 관리하고 있을 뿐이니 함께 나누는 것이 당연한 의무가 됩니다. 이처럼 보은의 사고에는 공심(公心)이 바탕됩니다. 모든 것을 공도로 보는 것입니다. 각자는 사은의 공물이기에 공익으로 되돌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보은에는 아만심이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아상(我相)이 없습니다. 응용에 무념할 뿐입니다.(천지보은의 조목) 자비에는 아상의 함정이 있을 수 있으나 보은에는 원천적으로 아상의 길목을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 보은-응답하는 능력


이런 의미에서 대종사님은 『정전』에서 「보은」을 핵심으로 신앙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보은한다는 것은 상대를 모시는 신앙심이기 때문입니다.


보은의 보(報)는 ‘갚는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보답’에서 그 뉘앙스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갚는다는 것은 반응하여 응답하는 것입니다.


반응한다는 것은 감수성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응답하기 위해서는 감수성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감수성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보은에는 수양이 바탕되어 있는 것입니다. 맑고 밝은 마음이어야 감수성이 살아나는 것이고 감수성이 살아있어야 타인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의 은혜를 민감하게 느끼는 감수성에 바탕하여 그 은혜에 응답하는 책임감, 이것이 보은입니다. 마치 메아리처럼 응답하는 것입니다.


백년보은! 우리는 백년보은을 해야 합니다. 백주년을 향해 백년보은도 해야 되지만 사은에 백년보은해야 합니다. 백년은 미래의 백년입니다. 시혜적 아상(我相)이 없는 『보은』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살려 은혜를 심고 은혜를 나누는 백년보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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