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열람의 기연(대종경 서품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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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열람의 기연(대종경 서품 2~3장)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3.0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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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종경 톺아보기 2 / 박용덕 교무 , (군북교당)

서품2장은 불교와의 기연과 불법을 주체 삼아 회상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대종사의 말씀이다. 서두의 ‘대종사 대각을 이루신 후 모든 종교의 경전을 두루 열람하시다가’는 원기 원년의 상황이다. 대각 원년에 어떤 경전을 먼저 보았을까? 가장 가까운 연인 의형 김성섭(팔산)을 통하여 선서仙書 계통의 「음부경」,「옥추경」을 보았을 것이다. 김성섭은 태을도 신자이다. 옥추경은 뒷날 산상기도 시 독송하고, 음부경은 ‘일원상서원문’ 작성 시 인용된다.


또 천도교를 믿는 외삼촌 유성국과 이모부 최씨(최복경의 부친) 등을 통하여 「동경대전」,「용담유사」를 읽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7세 연상인 훈장 김화천을 통하여 「소학」과 「논어」,「중용」,「대학」,「맹자」 등 사서(四書)를 열람하였다. 처화의 한학지식은 결혼 전후하여 김화천 훈장에게 「통감」을 배우면서 문리가 터졌다. 「원불교 교사」제1편 2장 5절 ‘대각’ 항에 보면 대종사 ‘글공부한 시일이 2년에 불과하였다’는데 이는 맞지 않다. 길룡리 주민들 사이에 “진섭이(대종사의 아명)는 천자문도 못 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동지팥죽을 안 준 것이 발단되어 훈장을 놀래주기로 약속하여 훈장댁 땔감에 불 지른 이후로 글방에 발길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는 뜬소문에 불과하다.


많은 소작인을 거느리는 부친 박성삼의 재력으로 보거나 4남2녀 중 가장 기대가 큰 셋째아들에게 시작 하자마자 글공부를 그만두게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글방이 어디 한 군데뿐인가. 5년간 산신 기도하러 다니면서 언제 글공부하랴 그러는데 종일 산중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삼밭재 마당바위는 오후에 세 시간 정도면 충분히 기도하고 올 수 있는 거리다.


길룡리 6걸의 존장인 역학의 대가 문자삼이 천거한 새 훈장은 그의 문하생 김화천이라는 18세 청소년이었다. 권위적이고 허세 부리던 이화숙 훈장에 비할 수 없는 진섭이보다 일곱 살 위인 다정다감한 형뻘 친구였다. 한동네 사는 형뻘인 김화천에게 배우게 되면서 진섭은 글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진섭은 15세에 결혼하고 ‘처화’라는 자(字)를 쓰게 된다. 갓 결혼한 십타원 대사모의 이야기에 의하면 밭 매다 들어보면 글방에 신랑 목소리가 가장 낭랑했고 “금방 창창 「통감」 한권을 엿새 만에 떼었다”고 한다.


영광지역은 대개「천자문」,「추구」 또는 「무제시」,「사략」,「통감」을 보는데 수학기간은 5~6년간이다. 통감은 송나라 사람 사광의의 중국 사서(史書)로 56권까지 있는데 보통 통감 2권~3권째 문리가 튼다고 한다. 글방 친구 고현태의 말에 의하면 처화는 통감 2권째에 문리를 텄다고 한다. 11세부터 15세까지 글공부를 하였다면 5년간 글방에 다닌 셈이다.


처화는 대각한 뒤로 자신의 존재를 빛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로 법명을 중빈(重彬)이라 하였다. 한때 그의 글방 스승이었던 훈장 김화천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태을도 치성 뒤로 모여든 40인의 신도중 한 사람이었으나 8인 제자로 선택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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