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열람의 기연(대종경 서품 2~3장) 2
상태바
금강경 열람의 기연(대종경 서품 2~3장) 2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3.13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 대종경 톺아보기 3 / 박용덕 교무 , (군북교당)

소태산은 「금강경」을 읽고 법열이 넘쳐 구호동 김 훈장 집에 갔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은 김 훈장밖에 없었다.


“선생님, 귀한 책 하나를 구했는디 한번 보시요.”, “어! 불경 아녀? 내가 유서는 많이 봐서 알지만 불경은 본 일이 없당께. 책 제목부터 읽는디 뭔 말인지 모르겠단 말이여. 땀을 삘삘 싸. 「금강반약파라밀경(금강반야바라밀경을 음역 없이 읽음)」이라, 대저 이게 무슨 말이여? 범어(梵語)라 이상스런 글자가 있잖아. 미리 전주(箋註)를 읽었던 종사님은 쭉쭉 해석한단 말이여. 아. 세상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책을 가지고 와서 읽고 해석해주려니 말문이 막혀 정신을 잃어버렸어. 조금 있다가 (대종사님이) 책을 덮어놓고 “갈랍니다.” 하고 나오는데 (훈장이) 전송을 못했어. 삭신이 딱 오그라들어 가지고 일어서들 못했어. 아, 오죽 혼났으면 자기 가족한테 유언했을 것이여. 내 생전에 그렇게 혼이 나보기는 첨이여. 가족을 모아놓고 이 얘기했어.” (김형오 선진 구술)


소태산은 20세 전에 영광교회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신구약 성경을 구해 통독하였다. 그의 여러 경전의 열람이, 비교적 주변에서 구하기가 용이한 선서(仙書), 동학(東學), 유서(儒書), 성서(聖書)보다 늦게 불서(佛書)를 접하게 되었다.


비로소 「금강경」을 보고 “서가모니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고 찬탄하고 연원불(淵源佛)로 정하였다.


「금강경」은 원기 2년 사월초파일 전야에 몽중(夢中)에 계시(啓示)로 책명을 알게 되었다. 의형(義兄) 김성섭을 시켜 구하게 하였으나 구할 방도를 모르는데 사월초파일에 군서 사람 이재풍(一山)이 왔다. 8인 제자 중 가장 늦게 입문한 제자이다. “대종사님 대각하시고 「금강경」을 보시고자 하였으나 팔산 선생이 모르므로 일산을 통하여 불갑사에서 이 경을 가져다 보시고 “나 먼저 대도를 안 사람이 있었구나.”라고 하셨다.” (이병은, 대산종법사 법문과 일화, 1967. 12. 8 법설)


소태산은 각(覺) 후 이듬해 1917년 봄, 사월초파일(釋尊誕日) 전날 새벽에 한 꿈을 꾸었다.


‘대종사 이미 도를 얻으시었으나 그 무엇으로써 이 도를 이름하며 어떠한 방식으로써 중생을 교화할까 하여 심사묵고 연마에 연마를 거듭하시더니 병진(丙辰) 4월 7일(음력) 새벽에 대종사께서 한 몽사(夢事)를 얻으시니, 기골장대하고 풍채 헌앙한 도승 한 분이 찾아와서 인사를 마친 후에 소매 속으로부터 조그마한 책자 하나를 꺼내어 대종사 전에 올리며 ‘선생님, 이 책의 뜻을 아시겠나이까’ 하거늘, 대종사 그 표지를 보시니 「금강경」 석 자가 분명한지라. 대종사 답해 가라사대 ‘내가 아직 이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으나 읽으면 혹 알 듯도 하다’고 하셨다. 그 도승 또 말하기를 ‘이것이 선생님의 종지(宗旨)인 즉 두고 잘 읽어 보십시오’ 하고 표연히 떠나가는지라 대종사 익조(翌朝)에 제인(諸人)을 대하사 그 몽중 소감을 말씀하시고 근처 사찰로 곧 사람을 보내어「금강경」을 구해 오라 하시니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에는 금강경 판까지 있으므로 한권의 책을 베껴 오는지라 대종사 크게 기뻐 하사 전후 경의를 살펴보시고 무한 찬탄하시며 좌우 제인으로 하여금 독송 연구하라 하시니 이것이 곧 불교와의 첫 기연이었으며.…’ (송도성,「대종사약전」, ‘불법 기연’)


대종사가「금강경」현몽을 한 날은 사월초파일 전날 새벽, 그리고 그 다음날 석존탄생일에 사람을 시켜 불갑사에 「금강경」을 구하여 오게 하였다고 「약전」에는 서술하고 있다. 이공주 편「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 역사」에는 당시 금강경을 구하여 온 사람은 일산(이재풍의 법호)이며 그가 처화를 만난 것은 시창 원년 5월 30일(음력 4월 29일)이라 밝히고 있다. 동(同) 저서 ‘전무출신 약력 제 8호 일산 이재철’ 항의 출가전기(出家前記)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원기 원년 4월 29일(음력) 사산 오창건 선생의 지도로 대종사님을 배견하고 장차 본교 창업의 취지를 들은 후 적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듯 환희용약하여 즉석에서 사제지의를 맺었다. 대종사 대각을 이루시고 비몽사몽간에 생각나신 경명이 「금강경」이었다. 때는 원기 원년 5월(음력) 대종사의 명을 받들고 금강경을 구하러 불갑사로 향하는 26세의 한 선비 청년이 있었으니 이가 곧 일산 이재철 선생이었던 것이다.’


cafe.daum.net/zusan


(원불교역사의 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