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욕기생 愛之慾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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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욕기생 愛之慾基生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4.26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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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울안칼럼 / 박대성 교무 , (본지 편집장)

딸깍발이 훈장 선생님에게 논어를 배울 무렵이었다. 학동이라고 해봤자 나 하나뿐이었고 한여름 찜통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서당 안에서 글을 읽고 있노라면 하얀 종이와 검은 글씨가 어느새 하나 되어 회색으로 아롱졌다. 그렇게 깜박 졸고 있다 정신을 차릴 양이면 앞에 계신 선생님도 고개를 꾸벅하시다 겸연쩍은 듯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자세를 고쳐 앉으셨다. ‘아, 스승 노릇의 지난(至難)함이여.’


아무튼 논어에는 몸에 문신으로라도 새겨두고 틈틈이 챙기고 싶은 아름다운 구절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한 글귀가 ‘안연’편에 나오는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이란 말씀이다. 이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요즘 이 문구가 남녀간의 사랑을 넘어서 조금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서울교구는 작년 교구교의회의 의결에 따라 올해부터 본격적인 교화구조개선에 대한 논의에 나선다. 강남과 강북 그리고 교구청 중심의 대형 거점 교당의 확보, 법회 출석 100여 명 이상의 중형 교당 육성, 교당 간 통합도 염두에 둔 교화정체 교당에 대한 정책적 판단이 핵심 내용으로 제시됐다. 특히 지난 7일 진행된 기획위원회에서 “교당을 세우기는 쉬워도 없애기는 어렵다.”고 한 참석자가 언급한 것과 같이, 교당 간 구조조정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면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수십 년간 애착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던 교당이 간판을 바꿔 달수도 있다는데 누군들 가만히 있을까?


허나 냉철하게 바라보자. 서울교구 평균 법회 출석수가 5000명, 개신교 대형교회의 출석수에 겨우 미치는 숫자이다. 필자는 이 숫자가 적다고 지적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알토란 같은 핵심 교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교화시설 유지에 소요되는 비용은 차치하고 산술적 계산만으로 동일한 출석수의 교회에서 활동하는 목회자 평균 20여 명, 서울교구 교화 현장의 교역자 100여 명이다. 교구 현장 교역자의 비율이 교회의 그것보다 5대 1 정도 월등히 높지만 지속되는 현장 피로감과 교화정체는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교무들의 능력이 목사들만 못해서 그런 것일까? 누구도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에는 현재의 구조적 모순이 문제일 것이다.


더욱이 이사 등의 이유로 지근거리의 교당을 두고서 구태여 예전에 다니던 지역으로 법회를 출석하고 있는 비효율과 번듯한 랜드 마크는 고사하고 교도들을 위한 교육관이나 법회 때 주차나 행사를 편히 할 수 있는 공간 하나 적절히 갖추지 못한 영세한 개 교당의 현실은 사반공배(事半功培)로 규모의 경제와 효율성을 강조한 교법정신에도 걸맞지 않다.


혹자는 이번에 추진 중인 교화구조 개선안이 자칫 개악(改惡)으로 흐려지지는 않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야 한다. 격렬한 논쟁으로 때로는 얼굴을 붉힐 수도 있지만,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물어서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그 속에서 결정된 사항에는 마음을 모으고 합력하는 것이 우리 일원가(一圓家)의 아름다운 전통이 아닌가.


김창규 서울교구 교의회의장이 강조한 것처럼 ‘모든 것을 원점(Zero-base)에서 시작’해야 한다. 각자의 사정은 조금 내려놓고 그동안 급한 일로 미뤄 놓고 아직 달지 못한 방울을 이번 기회에는 고양이 목에 달아 놔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달려들어야 할 시대적 급선무가 아닐까?


논어 ‘애지욕기생’에 이어진 구절은 다음과 같다. ‘惡之欲其死(오지욕기사) 미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죽게끔 하는 것이다.’ 이 회상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바라고 위급할 때 결코 죽게 놔두지 않겠다는 다짐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 한결 같은 우리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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