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과 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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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과 사은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5.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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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길튼 교무의 정전산책 23

사회적으로 집단적인 사고가 날 때면 공업(共業)이라는 말이 대두됩니다. 어떤 사건에 공모되어 이런 결과를 우연하게 같이 받게 된다는 해석입니다. 이런 공업 해석의 사상적 계보와 본의를 살펴보는 것은 시대정신의 요청이 될 것입니다.



공업과 불공업


불법에서 우주를 생성해 내는 힘은 그 이전 우주에 살던 유정의 업력이며, 일체 유정은 각자의 유근신(육근)과 미래의 자신을 불러일으킬 독자적인 업 즉, 불공업(不共業)과 그 소의처인 세계(器世間)를 마련할 공동적인 업 즉, 공업(共業)을 짓는다고 합니다.


공업은 개별적인 업이나 업보인 불공업에 의한 과보가 아닌 것으로, 공업은 업의 공통성을 의미합니다. 각각의 유정은 자기의 공업에 따라 자기의 기세간을 형성하는데 그 업이 같은 것이기에 기세간 또한 같은 기세간이 되는 것입니다.



차별세계에서 평등세계로


그렇다면 이런 업으로 형성된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요? 이 세계는 서로 연기(緣起)된 상호 의존적인 세계입니다. 의존은 대립과 차별의 세계로 누군가의 희생과 피땀에 바탕해 있는 불평등한 세계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차별적 관계에는 이미 불평등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한쪽이 얻는 이득만큼 반드시 누군가는 차별적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해야 합니다. 사실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는 이미 누군가의 고통을 먹고 사는 것으로, 현실을 단순히 상호 의존적인 은혜로운 세상이라 치부하여 조화와 상생의 논리로 평면화하는 것은 차별적 세계를 미화하는 권력의 논리입니다.



공업의 본의와 사은(四恩)


불공업은 개인적인 업보로 설명할 수 있으나 공업은 공통적인 사회적 업, ‘우리’의 인과입니다. 그러므로 공업은 ‘사회적인 보은-배은의 인과’로 설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은의 보은과 배은의 결과처럼 우리가 사회적으로 배은하면 사회적인 배은의 결과가 있게 되고, 사회적으로 보은하면 사회적인 보은의 결과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별세계의 불평등을 외면하면 그런 억압이 있는 사회에서 우리도 언젠가는 억압당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억압 없는 사회를 만들어 놓으면 나와 우리도 역시 억압당할 일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고통과 악업과 불평등의 사회구조를 모르는 체 외면하면 어느 순간 그 사회구조가 우리에게 고통의 과보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 연관된 존재이므로 현상적으로 대중의 고통이 나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필연코 나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됩니다.


개별적 인과는 악한 일을 하면 그 사람이 벌을 받게 된다고 해석합니다. 이를 자칫 잘못 해석하면 현 사회에 어떤 부조리한 구조가 있을 경우 나는 잘못한 일이 없으니 그런 고통은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이라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 고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막상 억압에 처하면 이는 개인적 업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공업의 문제를 방기한 결과임을 뒤늦게 깨달게 됩니다.



공업을 책임지는 주인의식


차별세계에는 권력이 있습니다. 권력을 많이 가진 자와 지배받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책임의 주체가 됩니다. 책임에는 경중이 있으나 책임에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도의적이고 윤리적인 책임과 사회 저변의 안전을 잘 입법 치법하는 지도자를 잘못 선택하고 감시 못한, 그런 부조리한 사회를 방기한 정치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업은 책임을 지우는 부채가 아니라 책임지려는 주인의식으로 접해야 됩니다. 이것은 스스로 사회적 보은을 못해서 이런 결과가 생겼다는 각성과 책임의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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