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와 이춘풍의 대화 (서품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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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와 이춘풍의 대화 (서품 10장)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6.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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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종경 톱아보기 8 / 박용덕 교무 , (군북교당)

길룡리 방조제는 축조 이후에도 방언조합원들에 의해 계속 보수되고 수호되었다. 염독(鹽毒)으로 인해 공사 준공 직후 바로 소출이 나오지 않는데다 천정리 부자 김덕일에 대한 채무 청산 등의 애로가 있었다. 채무 청산은 후일 길룡리 조합원이 아닌 외지 사람들의 보조가 있어 해결을 보았다. 원기6년에 전주 사람 김동순(金東淳)의 후원으로 허술했던 목조 수문을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축조하였고, 원기11년에는 경성 회원 이공주가 7년 동안 청산하지 못하였던 방언조합의 부채를 일시에 처리하였다. (불법연구회 창건사 11장, 미주(尾註))


길룡리 간척답은 5년째 접어들면서 온전하게 지력(地力)이 살아나 새 땅에서 제대로 소출이 나오게 되었다. 「대종경」서품 10장의 ‘방언공사의 의의’는 방언 준공 직후 설해진 것이 아니라 원기8년에 설해진 것으로 보인다. 소태산과 이춘풍의 대화로 전개되는 이 법문은 배경 설명이 없이 서술되어 자칫 연대상의 인식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1923년(원기8년) 여름, 소태산이 모친상을 당하자 각지의 제자들이 조문을 왔다. 그 해 길룡리 작은 언답과 큰 언답이 예년에 없이 벼농사가 잘되었다. 이때 소태산과 이춘풍의 대화 내용이 서품 10장에 담겨 있다.


이 법문의 성립배경은 방언답의 성공적인 풍작을 나타내는데 있는 것 같다. 짐작컨대 이 법문은 아마도 이춘풍과 외사촌 간인 정산에 의해 정리된 것 같다. 이춘풍(1876-1930)은 소태산보다 열다섯 살 연상이다. 소태산은 영광 농투성이 노인네들을 대하듯이 하대(下待)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깍듯이 사제의 예를 차리는 유학자에 대해 존댓말을 썼을 것이다.


「대종경」‘서품’ 장의 순서는 대체적으로 연대순의 배열로 짜여진 것같이 보이나 그 실상은 다르다. (도표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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