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회관 재건축을 말하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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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회관 재건축을 말하다’①
  • 한울안신문
  • 승인 2015.03.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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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법선 교도 / 원덕회장, 서울교당
- 40~50년 결실의 상징 서울회관, 18년 영욕의 역사적 거울

정산종사 말씀하시기를 대종사께서 우리 회상 초창 당시에 친히 구술하신 가사 가운데“사오십 년결실(結實)이요, 사오백 년 결복(結福)이라”고 하신 말씀이 있었나니,” (정산종사법어 도운편 1장)

이 당시엔 말씀처럼 풍요로운 결실로 교세는 날로 융창하여서 교화의 거점을 서울로 옮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기49년(1964)년 4월 교단 창립 5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개교반백년기념사업회(회장 박길진)”를 발족하고 일차적으로 서울청년회관 건립기금으로 400만 원을 책정했다.

이후 원기54년 1월 22일 제31회 임시수위단회에서는 수위단원으로서 6인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3월 28일 교정위원회에서“서울기념관건축위원회”구성을 결의하고 당일 오후 제14회 중앙교의회을 통하여 승인결의와 동시에 10배인 4000만원의 예산을 세웠다.

그런데 다음해인 원기55년 상임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지하 1층 지상 15층의 건물을 7억 원 예산으로 건립을 결의하고 34회(원기55년 9월 4일) 임시수위단회에서 결정하고 10월13일 훈련 중이던 교역자 300명이 상경하여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나 미처 한 달도 못 되어서 문제가 돌발하여 11월 8일 긴급히 교역자 2인을 급파하여 실상을 파악한 바 문제가 심각하여 원기56년 7월 20일 제15회 임시수위단회를 긴급히 소집하고 다음해 원기57년 1월 25일 제24회 교정위원회의가 울분을 토로하며 밤낮없이 4일간 속회되었다.

이는 교단초창기에 이룩한 결실을 모두 잃을 뻔했던 풍전등화의 교단위기를 가져온‘남한강 사건’이돌발하므로 숨 가쁘게 전개되었던 질곡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아니될 일이다.

이후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대산종법사는 특별유시를 통해서‘화급’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언급하며, “성공을 보지 못한 원인으로 1. 대종사의 이소성대의 훈계와 원칙을 우리가 받들지 못한 점, 2. 이일이 착수될 때나 진행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지를 충분히 종합하지 못 한 점, 3. 우리가 경제방면에 전문 지식이 부족했던 점”이라고 하시며 또한 이 일을 계기로, “1. 정교동심(政敎同心)의 계기, 2. 재가·출가가 다 같이 참여하는 계기, 3. 선·후진이 합력하는 계기, 4. 교단의 주인이 배출되는 계기, 5. 화합하는 계기, 6. 대종사의 근본정신을 각성하는 계기로 전화위복이 되도록 해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회의에서‘64인 서울회관 수습위원회’가 결성되고 1월 28일 마지막 날 ‘전무출신 총화강령과 결의문’을 채택하고 수습위원회에 위임했다.

특히 수습집행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12년 동안 각종 회의를 수시로 소집하며 수십 차례 회의 과정을 통해서 중지를 모으고 1,000여 명의 내외인사를 만나 협조와 의견을 수렴하며 인고의 기나긴 과정을 슬기롭게 대처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드디어 원기67년(1982) 10월 10일 동작구 흑석동1-3번지 대지에 서울회관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건물이 보전되지 못하고 1대 36년도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야 할 명분이 무엇인가? 다른 장소는 없는가? 백주년 기념관이 역사적 반백년 기념관을 없애고 그 자리에 대형으로만 신축되어야하는가?

최근의 용산수양관(하이원빌리지)을 통해서 살펴보면 2년도 못 돼서 폐기된“기반시설부담금”제도에 떠밀려서‘명분과 실리 그리고 공의와 법치’도 다 잃어버리고 교세정체마저 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는가?


왜 이렇게 갑자기 계획된 바가 없던 일이 벌어져야 하는가? 30여 년 교화 정체의 극복은 건물이 아닌 확고한 정체성 정립과 교법이 아니겠는가? 서울시내 4대종단의 건물을 서울회관과 비교 검토하면 새 방향이 보이지 않을까?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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