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멸과 인과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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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생불멸과 인과보응
  • 한울안신문
  • 승인 2015.05.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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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도상작가의‘마음으로대종경읽기’01-3 정법현 교도/북일교당


‘생멸 없는 도’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의 참모습은 생겨남과 사라짐이라는 이분법적 구분과 분리가 없는(박태원, 「원효」, 한길사, 2012년, 56쪽)”상태가 생멸 없는 도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사물과 세계는 생겨나고 사라지나 그 근본은 생겨 나지도 않고(不生) 사라지지도 않는다(不滅)고 했다. 이것을 일러 불생불멸의 도라고 하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니체가 겨우 여기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무(無)에서는 어떤 것이 생성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어떤 것도 소멸될 수 없습니다. (367쪽) 생성과 소멸은 없고, 모든 것은 항상 동일합니다. 모든 차이는 운동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원래 생동하는 것은 운동입니다. (368쪽)”(니체, 김기선 옮김,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 책세상, 2005년)


니체가 말하는 운동이 바로‘인과보응되는 이치’를 의미한다. ‘인과보응되는 이치’는 쉽게 말하면 무슨 일에든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깊게 들어가면 그 뜻이 매우 심오하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매우 단순한 인과보응의 이치이다. 하지만‘콩 심은데 콩 안나고 팥 심은데 팥 안 날 수도 있다.’이것을 불교에서는 연기적(緣起的) 인과라고 한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서구의 근대 과학적 인과 방법론에 익숙해져 있다면, 불교의 연기적 인과를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원인과 결과에 수없이 많은 조건이 서로 얽혀 보응하고 있는 것이 연기적 인과이다. 날마다 겪어내는 하루하루가 거의 똑같아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동일한 하루는 없다. 날마다 미세하게 다르다. 어제의 강물이 오늘의 강물이 아니듯이, 어제의 콘크리트 건물이 오늘의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다. 먼지 하나라도 더 붙었거나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비록 자기 집의 안방이라고 해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같은 방에 두번 들어갈 수 없다. 그 변화의 인과가 바로 연기적 인과인 것이다.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는 무슨 뜻일까? ‘한 두렷한 기틀’이란 일원의 진리에 근원을 세운 원불교이다. 기존의 불가(佛家)에서는 현실의 환각에서 벗어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원효식으로 말하자면 존재의 타향에서 벗어나 성품의 근본자리인 존재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즉 현실과 근본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태산의 일원의 진리는 현실과 근본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일심(一心)에 근거하고 있다. 우주만물은 생멸 없는 도의 원리로 돌고 도는 것이다. 그것을 소태산은 일원으로 표현했다. 그 일원의 핵심에 마음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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