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의 바퀴를 굴려가는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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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의 바퀴를 굴려가는 부처
  • 한울안신문
  • 승인 2015.10.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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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법현 교도 /북일교당


법신불 비로나자불을 모시는 법당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대광명전(大光明殿)이다. ‘비로자나(毘盧遮那)’는 산스크리트어‘바이로차나(Vairocana)’를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우주 가득히 비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빛을 뜻하는 법당에 모셔지게된 것이다.


또한‘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 곧법(法) 그 자체를 상징하는 추상적인 개념이므로 원래는 불상으로 형상화할 수 없는 부처이다. 그래서 이 부처를 일러 진신(眞身) 또는 법신(法身)이라 하며, 또 다른 부처와는 달리 설법(說法)도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해인사 대적광전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지리산 화엄사의 대웅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기에 대적광전이라고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선조의 아들 의창군이‘대웅전’이라고 현판을 써서 내려 보내는 바람에 대웅전이 되었다.


보신불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전(阿彌陀殿,또는 미타전), 극락전(極樂殿) 등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있으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이다. 누구든지 아미타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부르면 서방정토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아미타불은 무한한 광명(Amitabha; 無量光)과 무한한 수명(Amitayus; 無量壽)을 보장해주는 부처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이 대표적이다.


화신불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법당은 ‘대웅전(大雄殿)’이다. ‘석가모니불을 ‘대웅세존(大雄世尊)’으로 높이 불러 그 덕을 찬탄한 것에서 유래된’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셔져 있는 게 일반적인데 불국사 대웅전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내소사의 금당은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은 대웅전보다 한격이 높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대웅보전에는 주불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법당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은 부처가 아니라 불상이다. 부처는 법당에 있지 않고 허공법계에 편재(遍在)해 있는 근본진리이다. 그러나 대개의 승려들은 부처의 제자가 아닌 불상의 제자가 되어 절집에서 살고 있다. 중생의 삶에서 멀리 떨어진 곳, 실생활이 아닌 경치 좋은 곳에 사찰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새 소리 물소리 자연의 풍악을 사면으로 둘러놓고, 신자들이 가져다주는 의식으로 걱정 없이 살며, 목탁을 울리는 가운데 염불이나 송경도 하고 좌선을 하다가 화려하고 웅장한 대 건물 중에서 나와 수림 사이에 소요하는 등으로 살아 왔나니(대종경 서품 16장)”라는 소태산의 지적은 참으로 뼈아프다. 물론 조선의 모든 승려가 불상의 제자였던 것은 아니다.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은 원효는 경주로 돌아와 사찰로 가지 않고 저자로갔다. 원효는 저자에서 중생들과 함께 뒹굴며 부처의 제자로 용맹정진했다. 원효는 당대의 선승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최고의 학승이 되었다. 또한 생활승으로 살았다. 불상의 제자가 되어 귀족들과 어울리며 거대한 절집에 기거하기를 단호히 거부하였던 것이다. 원효는 구도자이면서 동시에 파계자로 살았고, 삶의 어떤 구속에도 발목을 잡히지 않았던 위대한 자유인이었다.


원효는 그렇게 자유롭게 생활불교의 터를 닦았고 자유자재의 공부하는 부처의 제자에서 중생과 함께 살아가는 파계부처가 되었다. 원효의 파계는 불상의 제자로 살지 않겠다는 일종의 부처선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태산은 제자들이 원효의 길을 걷기를 소망했던 것 같다. 작은 수레바퀴나 굴리고 있는 불상의 자들이 아니라 큰 수레바퀴를 굴려가는 부처의 제자로써 새 회상의 주인공이 되기를 염원했다. 게다가 소태산 본인은 부처의 제자가 되는 것마저도 거부했다. 소태산은‘불법이 곧 생활’이며‘생활이 곧불법’을 산중에서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소태산은 부처의 제자가 아니라 스스로 생활하는 부처, 노동하는 부처, 삶의 고통을 견디는 부처, 중생이 토해내는 고통의 소리를 보는 부처, 일원의 바퀴를 굴려가는 부처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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