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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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9.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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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업장 녹인...정경덕화 교도
“아들, 며느리와 같이 교당에 나오니 행복하죠.”
휴전협정이 맺어진 1953년, 정경덕화 교도(77세, 구로교당)의 나이는 당시 25세. 한참 꽃다운 새댁 시절, 전쟁 통에 포목장사를 하러 전국을 떠돌던 남편이 집을 나갔다. 워낙 풍채가 좋고 훤한 인물이라 여자들이 잘 따랐는데, 장사때문에 몇 달씩 집을 비우기 일쑤였던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던 것.
경상도 점촌에서 홀몸으로 1남 2녀를 키우다보니 동네 허드렛일은 모두 정 교도의 차지였고, 젊어서 안 해본일이 없건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시절. 결국 자식들과 먹고 살 일을 찾아 서울까지 올라온 정 할머니는 큰 아들과 함께 구로시장에서 포목장사를 시작했다. 이웃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이기도 교도의 연원으로 교당을 처음 찾은 정 교도는 인과법문이 마음에 닿아 1971년(원기56년) 1월 1일 구로교당에 입교했다. 그 전엔 “도대체 내 팔자는 왜 이럴까”하는 마음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었는데, 교당에 다니면서부터 “아마도 전생에 내가 지었으니 받는가보다”라며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던 것. 마음이 지옥이라고 혼자 속을 끓이다가도 교당에만 오면 마음이 편했고,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세정을 알고 항상 따로 죽을 끓여주신 김혜봉 교무님 얼굴을 뵈면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도 없어져 그저 원불교에서 마음공부하고 봉공하는 재미에 평생을 산 것이다. 요즘은 눈이 침침해 10분만 교전을 보면 현기증이 나지만, 지금도 정 교도는 사경(寫經)을 놓지 않고 있다.
공영주택에 월세를 살던 구로교당 초창기부터 1991년(원기 76년) 봉불식을 올린 20여 년 간, 그녀는 4시 반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새벽기도를 다녔고, 이후 김혜봉 교무 계실 적엔 아예 장사를 아들 내외에게 넘기고 교당에서 살다시피 했다.
특히 교당 불사 때문에 3일간 같이 먹고 자면서 총부로부터 된장비법을 전수받은 정 교도는 1년이면 교당에서 콩을 40가마씩 삶아냈고, 교당 차도 없던 시절 경동시장으로 콩 사러 다니는 것부터 머리에 이고 시장 골목골목으로 된장을 팔러 다니는 것까지 온갖 교당 뒤치다꺼리를 다했다.
원기 76년 구로교당이 문 열 적에, 5백만원을 들여 교당에 커튼을 단 이후론 아들이 하던 커튼장사가 배로 잘돼 “사심 없이 하니까 진리가 주시나보다”라며 더욱 신심이 나는 계기가 되었다. 교당을 완성하고 내 집이 생겼다고 좋아하던 기쁨도 잠시, 정 교도는 자궁암에 걸려 서울대병원에서 수술, 항암치료를 받고 죽다 살아났다.
봉사생활이 체화돼 감사생활은 습관으로 자리 잡았고, 일찍부터 가족교화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2남 1녀 손자들과 아들며느리가 모두 일원가족이다. 특히 효심이 지극한 큰아들 내외(강명원, 이순화)는 교도 부회장과 봉공회장을 맡아 안팎으로 착실하게 교당살림을 해나가고 있다. 더구나 어머니의 신심까지 빼닮은 아들은 재작년엔 온 가족 100%출석 서원을 세우고, 팔을 다쳐 기브스를 한 상태에도 법회에 나와 주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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