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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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0.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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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총부 인근서 어린시절 보낸...모경섭 거마교당 교도회장
“길을 가다 교무님을 만나면 마치 형제 같고, 누이 같은 마음에 다시 돌아보게 되지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여동생까지 전무출신인 모경섭 교도에게 원불교는 어릴적 뛰어 놀던 뒷동산처럼 다정스럽다.
교단 초창기 최도화 선진을 고모할머니로 둔 어머니(최보순)와 50세가 넘어 출가한 아버지(모성철 교무) 사이에 태어난 모 교도. 어린 시절부터 총부를 놀이터 삼아 내 집 드나들듯 뛰어다니고, 등하교 길이면 교당에 들러서 책가방을 던지고 놀던 추억이 이젠 그를 어엿한 원불교 주인으로 성장시켰다. 익산 총부엔 작은집이 있었고 모 교도의 집은 동산선원 근처였다. 어릴 적 형이 대종사 손자에게 알밤을 먹였다 할머니에게 혼난 기억이 남아 있을 정도로 대종사의 손자가 그에겐 초, 중학교 시절 1년 선배였다. “대종사님은 책속에 있는 먼 성자가 아닌, 그저 아무개의 할아버지”였던 것. 그의 집안에는 부모님 결혼 사진이나 가족 사진 대신에 일원상 좌우로 대종사, 정산종사, 대산종사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아침마다 좌선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그렇게 부모로부터 자연스레 물려받은 그의 신앙심은 세계 어디를 가도 그를 원불교의 당당한 주인으로 서게 했다.
포스코에 근무하면서 호주로 발령 났을 때, 해외교화를 위해 맨손으로 시드니에 온 장인명 교무가 안쓰러워 자청해서 통역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비자, 영주권 발급부터 법인등록, 교당구입에 필요한 서류작성 등 장 교무의 수족 역할을 했고 지금도 국제전화로 서로 안부를 확인하는 친구 같은 사이라고. 그는 시드니 교당 일을 돕다가 11년 전 귀국 후엔 거마교당(이영천 교무)에 다니기 시작했다.
94년 당시 거마교당은 창립한 지 몇 해 안되어 교도 수가 적었다. 이번에도 모 교도가 나설 수 밖 에 없는 상황이었고, 지금도 그는 지방으로 출장 갔다가도 일요일이면 서울로 돌아온다. 또한 출장비를 아껴 꼬박꼬박 유지비를 내는 등 9년째 교도회장직을 맡고 있는 거마교당의 대표 일꾼이기도.
“가난한 환경에서 컸지만 한 번도 돈 많이 벌겠다고 살진 않았다”는 모 교도는 “요즘 사람들의 물신숭배 풍조가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자식들에게도 “돈이나 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본원이 무엇이고, 내가 어떻게 생겨났고 왜 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항상 말해왔다.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자극을 위해 시민선방에도 나가고 있다”는 그에게 생활과 수행은 이미 오래전 부터 하나다. 그는 요즘 “천만경계 중에서 사심잡념과 번뇌망상을 제거해가는 공부”를 공부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교무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죠.” 그는 종교적 성향이 강한 둘째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전무출신을 권유해왔다.
서원정 기자 swon@w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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