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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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0.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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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품에서 살게 해달라 40년 기도...서초교당 김숙인 교도
하루라도 새벽기도를 빠트리면 밥을 굶은 것보다 더 허전해요.” 40년을 한결 같이 새벽 3시에 기상,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온 김숙인 교도(64세). 심지어 얼마 전 금강산 도덕발양대회에 가서도 새벽 3시면 일어나 다른 교도들 잠을 방해할 새라 조심조심 새벽기도를 올렸다.
40년을 계속한 기도의 위력인지 궁핍한 살림 속에서도 2남 2녀를 반듯하게 키워 저마다 화목한 가정을 일궜고, 25년 전 서초동 꽃동네 비닐하우스에서 출발한 이불집도 제법 자리를 잡았다. 더구나 서초동에 염원하던 3층집을 지어 자녀들과 모두 한집에서 살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들 며느리 손잡고 교당에 다닐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랜다.
직계가족 20명이 모두 일원가족이라는 김숙인 교도는 본래 전무출신을 서원했었다. 송영봉(정산종사의 큰 딸)교무가 운봉교당 재직시 입교한 김 교도는 당시 송 교무를 많이 따랐고, 주위에서 전무출신감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시집을 가야했다. 결혼 전 고생이라곤 모르고 자랐던 김 교도는 결혼과 더불어 16명 대식구 뒷바라지에 손에 물이 마를날이 없었다. 촌부자는 일부자라고 하루 종일 일감이 끊이지 않았고, 부잣집 외아들이었던 남편은 세상물정을 몰라 안팎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결국 김 교도 차지였다. 21살에 결혼한 그는 장수교당에 다니면서 시어머니(김월련)를 입교시켰다. 남들 마실 다닐 시간에도 틈만 나면 교당으로 가서 기도복을 입고 심고를 올렸다. 그러다 익산에 4남매를 두고 혼자 서울로 올라와 ‘화동침구’에서 하루에 이불을 35채 씩 꿰매가며 월급 10만 원을 받았는데, 그 돈을 한푼도 안쓰고 애들한테 보내면서도 “오직 진리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 30년 전 처음 느낀 기도의 위력
장수교당에서 둘째 생일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3킬로를 뛰어가는데 자신이 비 사이로 뛰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읍내로 돌아와 보니 빗방울이 머리에만 거미줄처럼 송송 맺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 처음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이후 큰 아들, 작은 아들, 사위까지 뭔가 큰 일이 닥치면 꼭 하얀 기도복을 입고 기도하는 어머니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꼭 시험을 잘 보거나 큰 사고를 면하는 일이 생겼다고.
그녀는 요즘 기도하러 가거나 교당에 갈 때면 가게 문을 항상 열어둔다. 혹 버선 한 짝이라도 사러 나왔다 허탕 치는 사람이 있을까 배려하는 마음에서다. 아무리 문을 열어놓고 다녀도 도둑 한번 맞은 적이 없다. 못 이룬 전무출신의 꿈을 후손 중 누군가가 이뤄주었으면 하는 김교도의 바람 속에 오롯이 사은님께 의지해 살아온 평생이 느껴졌다.
서원정 기자 swon@w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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