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생사관과 호스피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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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생사관과 호스피스 운동
  • 한울안신문
  • 승인 2001.07.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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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식교수"이화여대 종교학과


반갑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종교학을 강의하는 최준식입니다. 호스피스 회원들을 모시고 죽음에 대한 강의를 하게 돼서 대단히 기쁩니다. 오늘은 신종교운동의 생사관과 원불교의 생사관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종교사적 맥락에서 볼 때 한국은 19세기 말부터 종교적인 대변혁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최수운(1824∼1864)의 동학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일어난 신종교운동이 그것으로 당시의 한국 전통종교들은 이 신종교운동에서 나름대로의 큰 쇄신을 겪게 됩니다. 수십에 달하는 신종교운동의 창시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생사관을 모두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이라 창시자 가운데 선별하여 동학의 수운이나 해월(海月, 1827∼1898), 증산(甑山, 1871∼1909), 원불교의 소태산(少太山, 1891∼1943), 정산(鼎山, 1900∼1961) 등으로 한정하여 보기로 하고 주제의 범위도 철리적인 이해보다는 현실적인 이해에 중점을 두어 한국인의 생사관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되는 장제와 제사에 대한 이들의 주장이 전통의 것과 비교해 볼 때 어떻게 같고 다른가를 보기로 합시다.

제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

위에서 열거한 신종교운동의 창시자들이 전통적 생사관에 대해 많은 비판과 개혁을 논했지만 그들이 전통적인 것을 모두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대별을 해보면 수운 해월 증산은 전통적인 유교의 인간관을, 소태산이나 그의 제자인 정산은 전통적인 불교의 인간관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수운이 [용담유사]에서 “천지 역시 귀신이요, 귀신 역시 음양인줄 이같이 몰랐으니 경전 살펴 무엇하며”라고 말하였습니다. 증산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해하는데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죽은 뒤의 상태에 대해서도 유교의 설명에 동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김송환이 사후일을 물은대 가라사대 사람에게 혼과 넋(魄)이 있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도 되고 혹 선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 사대가 지나면 귀가 되나니라”라고 답했습니다.
한편 소태산이나 정산의 경우는 이들의 가르침을 모아 정리해 놓은 『원불교교전』에 「인과품」이나 「천도품」처럼 불교의 삼세인과설, 영혼(알라야식)불멸설 등을 다룬 장이 따로 둘이나 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생사관은 시종 불교의 그것을 추종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통 불교의 생사관에 대한 설명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쉬운 일상적인 용어로 되어있어 장황하게 인용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습니다. 가령 한 제자가 영혼이 윤회하는 과정에 대해 묻자 소태산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영혼이 육신에서 뜨면 약 칠칠(七七)일 동안 중음(中陰)으로 있다가 탁태되는 것이 보통이나, 뜨면서 바로 탁태되는 수도 있고, 또는 중음으로 몇달 또는 몇해 동안 바람같이 떠돌아 다니다가 탁태되는 수도 있는데, ... 한번 탁태를 하면 먼저 의식은 사라지고 탁태된 육신을 자기 것으로 아나니라” 위의 설명은 불교의 삼세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외에도 소태산은 업보설에 대해서도 불교와 그 맥을 같이 할 뿐만 아니라 아주 상세한 예를 들면서 후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행하는 죄업에 따라 그 과보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소태산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예를 듭니다. “남에게 애매한 말을 하여 속을 많이 상하게 한즉 내세에 가슴앓이를 앓게 될 것이며, .. (다른 사람을) 대중의 앞에(서) 무안을 주어서 그 얼굴을 뜨겁게 한즉 내세에는 얼굴에 흉한 점이나 흉터가 있어서 평생을 활발하지 못하게 사나니라.” 대체적으로 보아 이들은 위와 같이 전통적인 인간관이나 생사관을 그대로 받아 들였지만 몇가지 면에서는 합리적인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제례에 관해 선인들이 제시한 제사법 가운데 가장 새롭고 혁명적인 것은 해월의 향아설위(向我設位)법일 것입니다. 소위 향아설위라 함은 제사를 지낼 때 단을 벽 혹은 조상을 향해 설치하는 것(向壁設位)이 아니라 자신쪽으로 향하게끔 설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해월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옛적처럼 제사지낼 때 벽을 향해 신위를 모시는 것은 선천시대의 것이오. 그런데 한울님은 어디든지 있고 언제든지 있다는 사상에 따라 보면 선대의 수많은 혼백들은 후대의 수많은 혼백들과 서로 융합되어 있는 셈이 된다 하겠소. 따라서 부모가 바로 여기에 있고 스승이 바로 여기에 있는 셈이 되오. 때문에 나의 혼백이 곧 부모의 혼백이요, 동시에 스승의 혼백이기도 하오. 이런 까닭에 부모와 스승을 위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 되니 제사지낼 때 굳이 벽을 향할 필요가 없는 것이오. 이러한 향아설위법은 바로 신인합일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오”
향아설위법 안에 깔려있는 논리는 오히려 간단합니다. 즉 귀신이란 천지이고 음양이고 바로 나인데 귀신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조상들은 다른 곳이 아니라 나한테 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공연히 조상에 대해서 제사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월의 이 제사법은 우리 역사에 최초로 생겨난 근대정신의 발현 즉 ‘나의 발견’이라는 장대한 뜻이 있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장례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
장례에 관한 문제들은 이미 앞에서 제사법을 논의하는 가운데 많이 거론되었기 때문에 크게 달리 취급될 항목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간소화되어 전통적인 장례절차가 의미를 잃어버린- 현재라는 시점에서 볼 때 전통적인 장례법 가운데에서 문제로 많이 거론되는 것은 아직도 여유가 있는 계층에서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풍수설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장사방법 -매장 혹은 화장-에 대한 선호도의 문제입니다. 우선 풍수설에 대해서는 그 속설, 다시말해 부모의 장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손들의 화복이 결정된다는 민간적인 속설에 대한 비판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가령 실학의 태두였던 정다산은 “살아계신 부모님이 자식 잘되라고 자식 손 맞붙잡고 훈계해도 어긋나기 쉬운데 하물며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있는 아들에게 복을 줄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한편 근세의 종교가 가운데에는 정산이 풍수속설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을 하고 있어 주목을 끕니다. 풍수설에 의한 매장법에 대해서 제자가 묻자 정산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좋은 명당자리에서 장사지내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오. 그러나 그것과 자손의 화복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또 시신의 뼈를 자꾸 옮기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오. 자세히 들어보시오. 보통 식물들도 살아있을 때에는 땅의 정기를 받고 성장하지만 죽은 다음에는 땅의 정기를 받지 못하지 않소? 마찬가지요. 이미 생기가 없어져버려 토석(土石)으로 화한 백골이 무슨 능력으로 땅의 정기를 받아 자손의 화복을 좌우할 수 있겠소? 이것은 다만 옛날에 부모님에 대한 보은사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권한 형식이나 방편일 뿐이오” 아무리 조상의 뼈라지만 생기가 없어진 다음에야 돌이나 흙과 무엇이 다를게 있느냐고 합리적인 비판을 하면서도 풍수설을 한갖 미신으로 격하시키지 않고 하나의 방편으로 돌려버리는, 참으로 이성적이면서도 포용력있는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같은 대답에서 정산은 묘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아주 합리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제자가 원불교 교단에서 매장이나 화장을 모두 용인하는 이유를 묻자 정산은 화장쪽을 선호하는 투로 위와 같은 논리를 사용하면서 “화장이 비록 처음에는 박절한 것 같지만 영식(靈識)이 없고 이미 토석처럼 된 백골에 두 방법 가운데 무엇을 택하든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불교교리에 따르면 사람의 육체는 업과 결합된 것이라 그 업의 소멸을 위해서는 그 육체를 화장해버리는 것이 그 영에게는 좋을 것”이라는 화장선호의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 해에 장지의 면적이 여의도의 1.2배가 느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원)불교의 화장법과 그것을 권하는 합리적인 설명은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간호하는 사람이 가질 태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내기 전에 지금까지 보아왔던 한국의 성자들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 가운데 꼭 언급 및 소개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이 제시한 죽음교육법이 그것으로서 아마도 종교에서 제시한 죽음교육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그의 가르침이 불교에 기울어져 있는 한계가 보이지만 일반적인 시사점이 많아 앞으로 한국에서의 죽음교육을 정립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상세하게 적어보기로 합니다.
이 가르침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임종하는 사람을 간호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임종 당사자가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녀야 할 자세에 대한 것이 그것입니다. 우선 가는 이를 보내는 간호자의 입장에 대해서 소태산은 일곱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첫번째 두가지는 주위 환경정리에 대한 충고입니다. 첫째, 방에 가끔 향 등을 살라서 실내를 깨끗이 할 것. 만일 실내가 깨끗하지 못하면 임종하는 당사자의 정신이 깨끗하게 되지 못함. 둘째, 당사자가 있는 곳에는 항상 실내를 조용하게 할 것. 장내가 조용하지 못하면 그의 정신이 전일하게 되지 못함.
이어서 소태산은 당사자의 심리상태를 편안하고 의연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의 다섯 항목을 제시합니다. 셋째, 당사자 앞에서는 주로 선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그가 이전에 한 일 중에 좋은 선행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칭찬하여 그의 마음을 위안 할 것. 넷째, 당사자 앞에서 악한 소리나 간사한 말 혹은 음탕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이런 이야기들은 당사자의 마음에 남게 되어 다음 생에 갔을 때 습관으로 남기 쉽기 때문. 다섯째, 당사자 앞에서 재산이나 친족에 대한 걱정, 혹은 그것에 연연해 하는 태도를 보이지 말 것. 자꾸 이렇게 되면 당사자가 탐착이나 애착을 갖게 되어 그 영혼이 그곳을 떠나는 데에 지장을 가져옴. 여섯째, 당사자를 위해 염불도 해주고 경전도 읽어주며 혹은 가르침을 들려주는 것이 바람직함. 그러나 만일 당사자가 소리를 싫어하면 명상을 하는 것도 좋을 것. 당사자는 여기에 정신을 의지하여 안정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일곱째, 당사자가 임종에 임박하여 호흡을 모을 때에는 절대로 울거나 몸을 흔들거나 부르는 등 시끄럽게 하지 말 것. 그런 것들은 한갖 떠나는 사람의 정신만 어지럽힐 뿐 아무 이익도 없기 때문. 그러나 정 슬픔이 복받치면 죽은 뒤 몇시간 지나서 울 것.
참으로 철저하게 임종하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안정되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사려깊은 가르침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특히 임종자가 마지막 가는 순간에 간병자들이 그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감정을 이기지 못해 대성통곡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무이익함을 소태산은 일곱번째 조항에서 지적하면서 정 울고 싶으면 영이 완전히 떠난 몇시간 후에나 울으라는 사려깊은 충고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것들은 대단히 상식처럼 들리지만 죽음교육에 너무 소홀했던 우리에겐 매우 긴요하고 훌륭한 지침이 되리라 믿습니다.

임종 당사자의 자세
그러면 실제로 죽는 당사자들은 어떻게 준비하여야 할까? 소태산은 “물론 현재의 생을 잘 사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지각이 열린 사람은 죽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고 지적하면서 “이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빠르고 늦음이 따로 없지만 사십이 넘으면 죽어가는 보따리를 준비해서 나중에 죽을 때 바쁜 걸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진작부터 죽음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이 바로 가까워졌을 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임종이 가까왔음을 알게 되면 일단 모든 일에 대한 생각을 비워 마음을 수습하고 정리해야 한다. 유언은 미리 해놓아 더이상 생각하지 않도록 해서 이때 가장 중요한 일인 정신통일에 방해가 안되게 해야 한다.”
죽음준비에 대한 첫번째 요건으로 소태산은 정신통일을 꼽습니다. 아마도 심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데에는 정신통일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그 다음에는 화해를 말합니다. “또 스스로 살펴서 평소에 누구에게 원망을 품었거나 원수를 맺은 일이 있으면 그를 불러 될 수 있는 한 마음을 풀고 혹시 그 상대자가 없으면 혼자라도 원망하는 마음을 놓아버려야 한다. 만일 이 원망하는 마음을 풀지 못하면 이것이 다음 생에 나쁜 인연을 만들 수도 있다. 동시에 평소에 가졌던 집착을 억지로라도 버리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임종도 제대로 못할 뿐더러 미혹에 끌려 계속 방황하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상태로 계속 힘써 오다가 마지막 순간이 이르르면 더욱 더 깨끗한 마음을 갖고 명상이나 염불 등에 의지해 영혼이 떠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소태산은 당부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소태산은 이러한 준비가 임종을 맞이해서 갑자기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일정하게 수련을 한 사람에게나 가능하기 때문에 평소의 지속적인 훈련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신종교의 장례와 제사 그리고 죽음에 대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훌륭한 생사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불교의 생사관은 합리적이고 자세합니다. 이 정신을 살려서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에게 은혜 베푸는 호스피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리:전재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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