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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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교화
  • 전재만
  • 승인 2002.03.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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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원순이
나는 네팔에서 동물원의 원숭이다
거리에 나서면 “헬로우 마담”하고 손을 내미는 부랑아들부터 물건을 팔고자 따라붙는 장사꾼들, 그래도 그것은 좀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내가 반응이 없다면 혹은 인상을 쓴다거나 화를 내는 척하면 멀어지곤 하니까
집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를 구경하러 오는 동네 사람들로 온통 원숭이가 된다. 처음 포카라 우리 동네에 들어가던 날, 어떻게 알았는지 상당수의 동네사람들이 마당 여기저기에 앉아 있었다. 지금은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기에 생각해 보면 상당히 먼 거리에 사는 사람까지 와 있었다. 이른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어느새 와서 진을 치고 앉아 있는 동네 꼬마들, 그들은 정말 끈덕지게 와서 앉아 있었다.
섣불리 그 아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수 없는 상황에서 우린 그저 속수무책으로 원숭이가 되어야 했다. 밥을 먹으면 창문에 매달려 바라보고, 책을 읽으면 발 밑에 와서 앉아 있고, 물을 먹으면 우리 입을 바라보고 있고, 이건 앉을 수도 서 있을 수도,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밥을 먹으려면 모든 문과 커튼까지 쳐야 했다. 우린 그들과 특별히 다른 반찬을 먹는 것도 아닌데 다르다면 김치를 먹는다는 것 뿐, 그 뿐이 아니었다.
아침을 먹고 난 시간 오전 10시경이면 동네의 아낙들이 마치 매일 매일 조를 짜서 돌아가면서 순번제로 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부엌 입구에 진을 치고 앉아서는 냉장고의 문을 열면 들여다보고 부엌에 들어와서 이것 저것 만져보고 아무런 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생활은 고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물조차도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결국 우린 사람들이 오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지만 집 안으로는 절대로 못 들어오게 막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낙들은 아낙들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앉아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일정이 몇 달을 계속되는데 이건 미칠 지경이었다.
우린 이들의 상황이 어떤지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태여서 무조건 아이들에게 접근을 할 수도 없었다. 어쩌다 아이들수가 적어서 빵이라도 한쪽씩 구워 먹이면 그 다음날은 여지없이 몇 배로 아이들이 많아진다. 그것도 무작정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정말 진퇴양난이었다. 어떤 것으로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구령에 맞추어 운동을 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가라데’였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태권도야, 넓은 우리마당에 태권도 교실을 무료로 열면 거의 모든 동네 아이들이 올 것이다.
그걸 시작으로 아이들 삶의 질서를 잡아주면 적어도 손발을 깨끗이 씻고, 옷도 깨끗이 빨아 입고 아무 곳에나 볼일을 보는 것만이라도 잡아 줄 수 있다면 성공이다. 지금은 적당한 네팔인 태권도 사범을 찾고 있다.
머지 않은 날 우리마당엔 아침을 여는 태권도 기합소리와 동네 아이들의 깨끗한 모습과 질서가 나타나게 되리라. 태권도 선생님이 오면 와서 배울거냐고 동네 아이들 몇 명에게 물었더니 벌써 소문이 퍼져 아이들은 나만 보면 태권도 선생님이 언제 오느냐고 묻곤 한다.
아이들이 바뀌면 온 동네가 바뀌리란 기대와 함께...


네팔교당"이진상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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