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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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 한울안신문
  • 승인 2002.09.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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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욱 편집장(한울안신문)
소름이 쫙 돋아난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하는 문소리를 보면, 지난날 잘못과 죄업이 얼마나 될지. 순식간에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왠지 장애인을 특히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하는 것은 ‘연기’가 아니고 ‘흉내’이며 ‘흉내’는 상대방을 놀리는 것이라는 인상 때문에 화면을 보기가 민망하다. 그래도 문소리는 꿋꿋하게 연기를 계속하고 이창동 감독은 그것을 꿋꿋하게 계속 보여주기 때문에 ‘나도 못 볼 것 뭐냐’는 오기로 계속 화면을 응시한다.
문소리의 장애인 묘사는 너무나 흡사해서 깜짝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도대체 얼마나 저렇게 연습을 했을까하는 생각에 빠져 들게도 만든다. 하지만 문소리가 설경구와 동대문 역에서 의정부행 마지막 전철을 놓치고 휠체어에서 보통사람처럼 일어나 사랑을 노래할 때는 아쉬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하다가 갑자기 설경구를 극도로 사랑하는 여인 역으로 비약하려니까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사랑스런 눈빛은 너무나 어색하다. 문소리는 장애인과 너무나 흡사하지만 ‘연기’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설경구는 모자란 사람 역인데도 곳곳에 현란한 연기력이 물씬 풍겨서 역시 연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오아시스는 ‘장애인’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다. 우리가 장애인에게 갖고 있는 편견, 장애인은 불편하고 힘들고 그래서 사랑도 정상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창동 감독은 예리하게 꼬집어 낸다. 장애인인 동생을 이용하기만 하고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문소리의 오빠와 시누이, 역시 모자란 설경구를 이용만 하고 차라리 없어지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설경구의 가족들, 그리고 인천 어느 음식점에서 문전박대 당하는 문소리와 설경구를 통해서 장애인에 대한 우리들의 편견을 돌아보게 만든다. 문소리와 설경구가 맺은 육체관계를 짐승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진실을 얘기하지 못하는 문소리의 경찰서 연기, 수감실을 빠져 나와 문소리의 집 앞에서 나뭇가지를 자르는 설경구의 모습, 이것에 부응하려고 라디오를 크게 트는 문소리. 이런 이야기는 너무나 통속적이다.
이창동 감독은 ‘모자란’ 설경구를 모자라지 않고 오히려 순박하고 솔직하고 정직한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문소리 역시 1급 장애를 갖고 있지만 보통사람들이 갖는 ‘편견’이라는 장애보다는 훨씬 덜하다고 믿는다. 만약 문소리와 설경구의 연기가 꾸밈없는 백치미를 담고 있고 그것을 감독이 충분히 유도했다면, 또 문소리와 설경구의 사랑이 장애인의 사랑이 아닌,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으로 연출되었다면, 거기다 흥행을 고려하는 헐리우드식 각본도 필요하지만 삶의 의미에 더 깊이 다가갔다면 이창동 감독의 신념이 더욱 빛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박동욱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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