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 평화의 촛불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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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네거리, 평화의 촛불을 밝히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02.12.27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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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4일 오후 3시, 미 대사관 입구에 원불교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두 여중생 사건 원불교대책위원회」 황민수 위원장(원남교당)의 구호를 따라 1백여명의 원불교인들은 어색한 구호를 외쳤다. ‘부시는 사죄하라’ ‘불평등한 소파협정 개정하라’구호를 따라하는 동안 제법 소리도 잘 맞고 손동작도 맞아들어가자 몸을 오싹하게 조이는 추위도 성큼 물러갔다.
전산 이정택 교무(개벽교무단 대표)는 “두 여중생의 죽음은 남의 죽음이 아니라 내 아이의 죽음과 같다. 그런데 사고를 낸 미군은 무죄 선고를 받고 씩 웃으며 법정을 나섰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무죄가 될 수가 있는가? 이런 일이 언제든지 계속될 수 있는 불평등한 소파협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힘주어 외쳤다.
3시30분경 얼마전 붉은악마로 가득찼던 시청네거리로 향했다. 시청엔 이미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문정현 신부(불평등한 SOFA개정 국민행동 상임대표)의 규탄 연설이 지나고 신해철, 이선희, 안치환과 몇몇 가수들이 나와 ‘우리는 양심의 촛불을 켜야 한다. 미군과 부시가 무릎꿇고 사죄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힘없고 분열되어 분단국가로 있기 때문이다. 빨리 통일을 우리 힘으로 열어야 한다’는 요지로 연설과 노래를 불렀다.
촛불시위를 처음으로 생각해 진행했다는 한 고등학생이 나와서 연설했다. ‘11월30일 20명이 광화문 앞에서 시작한 시위, 아무도 이 사건에 대해 관심 갖지 않았던 이 시위가 이제 10만명이 동참하는 시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켠 촛불은 형상일 뿐입니다. 그 밑에 우리의 가슴에 이 촛불을 들게 하는 진정한 마음의 촛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깨었기 때문에 우리는 촛불을 들게 된 것입니다. 미선이 효선이를 위한 촛불, 이제 이 촛불은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반대’ ‘평화’의 촛불이 되고 있습니다. 12월31일날 이 양심의 촛불은 온 국민에게 전해지고 온 국민이 양심의 불을 밝힐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5시30분 정도가 되자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모여들어 5만이나 7만명은 되어 보였다. 「원불교 대책위원회」는 1천5백개의 초와 컵을 준비해 시민들에게 나누어 줬다. 5시40여분 정도가 되자 드디어 광화문 미대사관으로 행진이 시작됐다.
놀라운 것은 어린이, 학생, 젖먹이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의 손에도 응당 평화의 촛불이 들려졌다.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치려는 것일까? 혹 이런 것은 아닐까‘전 세계가 미국의 패권에 숨죽여 있을 때, 오로지 한국의 수백만 수천만 국민이 세계 곳곳에 주둔한 미군의 불평등한 법조항에 항의하고 아프간에 이어 이라크와 또 전쟁을 벌이려는 미국에 반대했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평화의 심장이 되고 모든 나라가 존경하는 도덕의 부모국, 정신의 지도국이 되었다.’
거리는 ‘마음공부 훈련장’ 같았다. 정신없이 바쁜 현대인들이 돈버는 것도 멈추고, 놀러가는 것도 멈추고, 추운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리고 두 여중생의 죽음을 나의 일처럼 분노하고 민족 주권 회복을 외치며 세계의 패권국인 미국에 당당히 맞섰다. 전경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이들이, 노인이,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정의와 세계평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고 서원했다. 구호를 외칠 때마다 10만 군중이 정의와 진리에 하나됨을 느낄 수 있었다.
밤 10시 경에 이르러 다리와 허리가 몹시 아프고 배도 엄청 고팠다. 그러나 효순이와 미선이는 우리들의 방관과 이기주의로 죽음을 맞았다는 생각이 들자 괴로움도 기쁨이 되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죽은자를 위한 촛불을 계속 들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박동욱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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