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석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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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의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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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8.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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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적 삶은 바쁘지 않다
우리는 아주 바쁘게 살고 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온통 일에 파묻혀 산다. 하나로도 부족해 두세 가지씩 직업을 가지고 살기도 한다. 무엇을 하느라 이토록 바쁠까. 분명 과거보다는 훨씬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화려하게 살고 있는데. 가만히 우리가 바쁜 이유를 성찰해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어렵게 장만한 집의 은행 융자금 갚느라 바쁘고, 아이 학원 수강료 버느라 바쁘다. 엊그제 새로 장만한 자동차 할부금 마련하느라 바쁘고, 지난 달 카드 빚을 메꾸느라 바쁘다. 실제 버는 액수로 보면 그다지 적은 것도 아닌데 웬 지출이 이토록 많은지 매월 적자는 늘어만 간다.
미래가 불안정하다 보니 연금도 믿을 수 없는 실정이다. 빠듯한 생계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노후보험을 하나 더 장만하였다. 지출은 또 늘어난다. 돈 버느라 바쁘게 이곳 저곳을 움직이다 보니 사고도 많아진다. 게다가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인해 의료비 부담도 만만치 않다. 벌어야 한다. 더 많이 벌어야 이 부담들을 모두 감당할 수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이런 부담에 더하여 온통 우리를 겁주는 이야기 투성이다. 불안한 중동지역, 나날이 늘어가는 실업, 물가는 치솟는데 경기는 바닥이다. 티브이를 켜면 온통 사고소식에다 흉흉한 살인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알 수 없는 내일을 위해 우리는 또 다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바쁘게 사는 삶이 나를 위한 삶일까. 돈을 버는 과정이 여유 없이 절박하다 보니 돈을 쓰는 것도 여유가 없다. 지극히 소모적이고 파괴적이다. 남들 다 가는 휴가 따라 가야하고, 남들 다 사는 물건 나도 장만해야 좀 안심이 된다. 제대로 놀았다는 말은 압축적으로 돈을 쓰며 놀았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통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런 비정상적인 삶을 거부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자신의 삶과 가족을 위해 한 나라의 장관직을 고사했다거나 고급 변호사 자리를 마다하고 목수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개벽된 삶을 살고자 하면 그와 같은 결단이 필요하다. 좀 적게 벌고 좀 적게 쓰더라도 온통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중생은 일생동안 자신만을 위해 살고자 하나 결국은 남 좋은 일하다 평생을 보내고, 부처는 온통 중생을 위해 살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산다.
세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기도를 하셨던 구인 선진님들은 역설적으로 바쁘게 살지 않으셨다. 가난하고 궁벽한 오지 마을에서 살았지만 일 년 중 여름과 겨울 삼 개월 씩 무려 일 년의 절반을 자신의 훈련과 진리를 위해 내놓았다. 그렇게 살면서도 교단의 기초를 세우고 경제 자립을 하였다. 진리를 믿고 진리적으로 사는 삶은 결코 바쁜 삶이 아니다.
만일 내가 지금 바쁘게 살고 있다면 왜 바쁜가 스스로 자문해보자. 우주를 통해 자신에게 이토록 적은 시간을 쓰고 사는 존재들은 인간들 밖에 없다. 바쁘게 사는 개미들조차도 하루 중 일을 하는 시간은 겨우 서너 시간이라고 한다. 대종사님은 물질의 노예생활을 벗어나라고 이야기 하셨다. 단지 교당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법문의 조목을 잘 유념하고 산다고 해서 모범적인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진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대단한 대의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통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온전하게 자신을 지키고 살리고 키워가는 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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