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천개벽론과 원불교의 과제 - 박윤철
상태바
후천개벽론과 원불교의 과제 - 박윤철
  • 한울안신문
  • 승인 2005.09.05 0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의 개벽적인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이 원불교의 역할이자 비전
청년회 대학생회 지도교무님들과 1기 개벽학교를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에 20년 만에 서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는데, 그 변화 중 하나는 원불교의 교화가 질적, 양적으로 침체되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출가 지원자 수가 최근 5년 사이에 1"2로 줄었다. 교단의 미래를 짊어질 정예부대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자초한 면이 크다. 실제로 서울교당에 다녔던 1974년 당시 서울에서만 적어도 100명 이상의 동급생들이 학생회를 졸업했다. 지금은 교당은 많이 늘었지만 학생회원수는 오히려 줄었다. 이러한 침체는 우리 교단이 20-30년 전, 젊은 세대들의 조직화와 관리에 소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현실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합리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20-30년 후 교단의 미래를 전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개벽학교 재출범은 우리 교단의 비전을 제시하는 큰 디딤돌이 될 것이다. 원불교의 사상적 뿌리 어떠한 종교나 사상도 과거의 전통,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던 적이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불교를 살펴보자. 원불교는 과연 어떤 종교이며, 개벽이란 무엇인가? 한 사상이 성립되는 근간에는 풍부한 사상들이 존재한다. 원불교가 등장했던 19세기 한반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당시는 동학과 증산교의 교세가 컸으며, 원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현재 교단에서는 대체적으로 불교와의 관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신종교(新宗敎)로서의 동학과 증산교가 원불교의 문화적 전통이자 대종사의 사상적 뿌리라는 점이다. 불교교리에서 사회과학적 요소를 찾기는 어렵지만, 동학·증산교에서 온 개벽 속에는 사회과학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면이 후에 변산·익산 시대의 불교적 전통 수용과 함께 원불교 사상의 뿌리가 된 것이다. 현재, 원불교는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사회 문제에 있어 참여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이것은 동학·증산과 연관된 개벽적 전통에서 그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교학(敎學)은 불교적인 것만 강조하고 개벽적 전통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있다. 동학·증산교와 개벽적 전통 동학·증산교가 발생했을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전까지는 동양은 동양대로, 서양은 서양대로 살아가는 지역주의의 사회였다. 그런데 제국주의가 팽배해지자 서양은 서구의 과학, 기술, 철학, 종교 등을 동양에 수출하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생각하게 됐다. 서양은 진리이자 문명이요, 동양은 비진리이자 야만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양은 수천 년 동안 독자적으로 많은 사상을 확립해왔다. 한국의 경우, 대승불교가 신라에 들어온 지 100년도 안된 시점에서 원효 스님이 확립한 화쟁(和諍)사상은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신라적 안목으로 집대성한 놀라운 사상이다.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 박제가, 유형원 등의 사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앞선 뛰어난 것이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사상들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서양이 우리나라에 수출하려 했던 서학(西學)은 자본주의라는 경제, 가톨릭이라는 종교, 과학기술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것이었다. 1860년에 발생한 동학은 이 땅의 현실에 충실한 주체적 학문을 지향하는 사상이었다. 조선도 자신의 힘으로 근대화할 수 있고, 보편적인 진리를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그러나 농민혁명으로 표현된 동학은 1894년에 일제에 의해 그 꿈이 철저하게 깨지고 만다. 이어 1901년에 등장한 증산 강일순 선생은 동학이 눈에 보이는 것, 즉 제도나 사회시스템만을 개혁하려했다고 지적하고, 당시의 사회문제들의 근원은 음계(陰界) 즉 신명계에 주장했다. 이 상극을 풀기 위해 무당의 굿과 같은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했는데,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문제도 함께 다스려야 한다는 증산의 이러한 주장은 한때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전에 없이 조직적이었던 동학과는 달리, 증산은 탈시스템화·탈제도화를 추구해 증산 사망 후, 교파들이 종교적 문제를 일으킨다. 소태산 대종사가 4세 된 해에 영광에서 큰 규모의 동학혁명이 일어난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그 때 영광은 혁명이 가장 격렬했던 지역 중 하나였으며, 민중의 희생도 엄청났다. 따라서 대종사는 동학에 대해 많이 듣고 자랐으며, 후에 동학의 사회과학적인 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을거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면은 원불교가 기존의 유·불·도 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개벽적 전통을 강조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원불교의 개벽적 전통, 즉 사회과학적 인식의 전통을 살려야 미래의 비전이 있을 수 있다. 교리속 원불교의 비전 끝으로 원불교의 비전을 교리 속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보기로 하자. 일원상 법어 속의 “이 원상은 마음을 사용할 때 쓰는 것이니”의 ‘마음’은 육근 중 하나이지만, 일원상 수행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에서의 ‘마음’은 일원의 체성(體性)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공부는 ‘체성의 마음’에 합일하여 ‘육근의 하나인 마음’을 일원의 체성같이 부려 쓰는 데 목적이 있다. 개인적인 공부와 사회적인 공부를 둘 다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공부요 도학공부이며 삼학공부인 것이다. 삼학에는 ‘사리연구’라는 조목이 있다. 이 때의 ‘사’는 일의 시비이해요, ‘리’는 이치의 대소유무이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 ‘일’과 ‘이치’가 각각 과학과 도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그 둘을 종합해서 하는 것이다. 이를 개교의 동기로 가져가 보면,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 그 생활에 어찌 파란고해가 없으리요’라는 부분은 원불교가 인간의 고통의 뿌리인 삼독심을 치유하기 위한 공부와 함께 사회문제에 대한 공부까지도 함께 하는 종합적인 마음공부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원불교 교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요컨대, 소태산 대종사는 개인 차원의 삼독심 문제만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 근대 물질문명의 문제 즉 과학문명의 병폐까지도 극복하자는 메시지를 정전을 통해 제시하신 것이다. 이와 맥락을 같이 하여, 현대 사회가 원불교에게 바라는 개벽적인 기대를 만족시킬 줄 아는 것이 원불교의 역할이요, 원불교의 비전이다. 정리 " 민소연기자? minso@won.or.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