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 경성에 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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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 경성에 가시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6.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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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 1



소태산 대종사가 최도화의 안내로 송규, 서중안, 전음광을 대동하고 원기 9년(1924) 3월 30일(음2월25일) 오전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경성행 열차를 타고 당일 저녁때에 경성역(현 서울역)에 내리게 된 것이 첫 상경이요. 경성교화의 출발이다. 경성역에 내린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역과 남대문(숭례문)사이 대로변 우측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평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첫 상경, 경성교화 출발


최도화는 이튿날 58세의 박사시화를 데리고와 인사를 시켰다. 박사시화는 1867년 남원 동충리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18세에 결혼을 하였으나 일점혈육을 두지 못한 채 부군마저 사별하여 청춘에 혼자가 되어 지내던 중 뛰어난 바느질 솜씨로 남원 원님을 지낸 도정궁(都正宮) 나리의 부인(대방마님이라고도 함)과 인연이 되었다. 대방마님은 박사시화가 총명하고 재질이 뛰어남을 보고 수양딸로 삼았다. 대방마님은 자신이 다니는 절(구례 화엄사)의 불사를 위한 권선문을 수양딸(박사시화)에게 주어 각지의 양반가에 보내 시주를 받아오게 하였다. 그 후 박사시화는 대방마님의 인연으로 쌍둥이 동생(박공명선)과 함께 경성으로 이사를 와 창덕궁 인근에 살면서 마님의 본을 받아 불연이 깊어졌다.
원기 8년(1923) 음 9월 박사시화는 경성에서 지리산에 있는 구례 화엄사로 불공드리러 가던 중 전주 기차 안에서 최도화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최도화로부터 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말씀을 듣고 생불님을 꼭 한번 뵙기를 원했다.
최도화가 소태산 대종사 첫 상경의 길 안내를 맞게 된 데는 박사시화의 인연과? 경성에서 2년간 승려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경성지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1883년 진안에서 태어나 13세에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으나 세상살이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다 경성에서 승려 생활과, 계룡산 동학사에서 독공을 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는 전주에 살며 보천교를 믿었으나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비단 행상을 하며 만덕산 미륵사의 화주 노릇을 하였다. 이때 정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의 명에 의해 변산 봉래정사를 나와 길을 가다 미륵사 주지를 만나 미륵사에서 겨울 한철을 지낼 때 최도화가 불공드리러 왔다가, 정산종사를 뵙고 생불님으로 모시다 정산종사가 미륵사를 떠나고 없자 수소문하여 봉래정사를 찾아와 소태산 대종사와 인연이 되어 도화(道華)라는 법명을 받고 귀의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7년 음 12월경에 오창건, 송도성을 데리고 만덕산 만덕암에서 3개월 수양을 하는 동안 최도화의 인도로 전삼삼, 전음광 모자가 원기 8년(1923) 2월16일(음1월 1일) 만덕암을 찾아 제자가 되었다.
최도화는 이공주에 의해 <회보>에 원불교 초기교단의 3대 여걸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최도화가 원기39년에 열반하자 정산종사는 빈소를 찾아 최도화를 통하여 전북지역과 서울지역 인연들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므로 “전북회상과 서울회상의 총연원이시다”라고 하였다.
박사시화는 소태산 대종사를 태평여관에서 만난 후 북촌 계동에 살고 있는 쌍둥이 동생인 박공명선과 상의를 하였다.
박공명선은 부군인 성재환이 경성에서 측량기수로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 숙환으로 별세하자 박사시화의 도움으로 살아갔다. 56세시 2월에 계동으로 이사와 외동딸인 성성원과 함께 살다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며 같은 계동에 살고 있는 전북 임실 청년인 진대익과 딸을 결혼시켜 같이 살고 있었다.
그는 사위와 딸에게 상의하여 소태산 대종사 일행을 며칠간 모시기로 하여 소태산 대종사 계동 진대익의 집에 도착하자 그 날(원기9년 양3월31일 음2월 26일 )박사시회와 박공명선이 귀의하여 경성의 첫 제자들이 되었다.
박사시화는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함과 동시에 사제지의를 맺고 전무출신을 서원하였다.
진대익의 집에서 3일여를 머무는 동안 소태산 대종사를 수행하였던 서중안은 전음광을 데리고 다니며 경복궁 인근 당주동에 1개월을 한정하고 20여 간의 가옥을 빌렸다. 소태산 대종사 일행은 당주동으로 거처를 옮기고 경성임시출장소로 정하였다.

당주동 임시출장소



당주동 임시출장소에서는 박사시화와 박공명선이 시봉을 담당하였다.
어느 날(음 3월) 박사시화는 계동 인근 가회동에 살고 있는 31세의 이궁가의 여인을 당주동 경성 임시 출장소로 데리고 왔다. 그는 박사시화가 전라도에서 온 생불님을 만나 뵙자하여 따라왔으나 소태산 대종사께 인사도 하지 아니하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이는 자신은 평민들과 다른 궁가의 지위가 있음을 내세운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그가 비록 궁가의 소실 신분이기는 하나 그 인물됨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말했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이 둘이 있는 것이오. 하나는 정법의 스승을 만나서 성불하는 일이요. 둘은 대도를 성취한 후 창생을 건지는 일인 것이요.”
엄숙하고 정중한 이 말에 위압감과 가슴에 울리는 감동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였다. 그리고 귀의하였다. 그가 바로 이동진화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생각할수록 전라도 도인의 말이 가슴 깊이 자리 잡았다. 침모인 김삼매화를 인도하여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시키기도 하였다.
이동진화는 1894년 함양 마천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5살에 부친을 사별하고 7살부터 진주에서 곡물 장사하는 오빠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때 이왕가의 종친인 이규용이 진주에 잠시 와서 있었다. 이동진화 오빠가 이규용에게 곡물을 보내주며 친분이 생겨 왕래하면서 이동진화를 만나게 되었다.
이규용은 이동진화의 미색을 보고 욕심이나 소실로 삼고 싶다고 해서 오빠가 허락을 하여 이규용이 이동진화를 경성으로 데리고가 18세에 결혼을 하였다. 그리하여 창덕궁 인근인 가회동에서 살다가 자신의 집 인근인 같은 동 79-4번지에 집을 사주고 살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몸은 편안하였으나 정신적으로 황폐해지자 건강이 좋지 않아 위장병과 두통에 시달리며 살던 중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귀의하였던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 당주동 임시 출장소에서 1개월여를 계실 때 몇 백미터 거리의 경복궁에서는 일제가 1905년 경복궁 ⅓을 헐어내고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장을 만들어 그때부터 경복궁을 공원화 하여 많은 사람을 돌아다니게 하였다. 그 후,? 일제는 경복궁에다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었던 때다. 그러나 1개월여의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의 행적에 대하여는 아쉽게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짐작만 할 뿐이다.
1개월여의 경성 임시출장소에서 이동진화 외 몇몇 제자들을 얻은 소태산 대종사는 3월 29일(양5월14일) 경성역에서 이리로 출발함으로써 첫 상경은 마무리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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