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주의 귀의와 서울 제자들 - 서문성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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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주의 귀의와 서울 제자들 - 서문성 교무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5.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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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의 제자들 3


북촌 계동에 사는 이공주는 어머니(민자연화)·언니(이성각)와 함께 동대문 밖 창신동으로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 나섰다.
소태산 대종사가 첫 상경하여 당주동 임시출장소에서 1개월 머물고 있을 때 소태산 대종사를 시봉하던 박사시화가 이공주집을 수차례 내왕하면서 전라도에서 온 생불님을 만나 뵙자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공주는 부군의 3년 상을 마치기전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박사시화, 박공명선 자매는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면 뵈러 가자고 수차례 권유해 약조를 받았던 것이다.

첫 만남
이공주의 집은 성성원의 집에서 같은 계동길 50여 미터 안쪽에 살고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첫 상경과 두 번째 상경사이에 경성제자들은 창신동 이동진화 수양채 등에서 몇 차례 만났던 것을 정황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어느 날 박공명선이 소태산 대종사께서 상경하였다며 적어준 창신동 주소 한 장을 가지고 세 사람이 찾아 나섰던 것이다. 이때가 원기 9년 11월21일(음10월25일)이다. 쉽게 찾을 줄 알고 나섰으나 이 집 저 집 문패를 보고 헤매다 날이 어두워져 세 사람은 계동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성성원의 집으로 찾아가 박공명선에게 어제 찾지 못하고 돌아온 이야기를 하자 집에서 일하는 아이를 딸려 길 안내를 하게 하였다.
세 사람은 ‘큰 어른을 뵈러 가면서 빈손으로 가서 못 만났나보다’ 하며 과일 한 바구니를 사서 들고 창신동 이동진화 집을 찾아갔다. 집에 당도하고 보니 창신동 605번지였다. 어제는 506번지 주소를 가지고 찾았으니 찾지 못한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이공주 일행이 대문에 들어서자 강동옥씨가 나와 “우리 선생님은 아무나 안 보시는데요?”하여 “꼭 만나 뵈어야겠다”는 이공주 일행의 말에 응접실로 사용하는 아랫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원기 9년(1924) 11월22일(음10월26)오전10시 소태산 대종사와 이공주의 역사적인 만남은 새 회상건설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청하문총 3권 《한마음 한길로》, 원불교 신보신서 2권《구도역정기》 구타원 이공주 법사편. 융타원 김영신 법사편, 《원불교 제1대 유공인 역사》등에는 이때의 만남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보배로운 구슬
이때의 상황을 요약해본다.
소태산 대종사와 이공주 일행이 상호인사를 나눈 다음 자리에 앉았다. 소태산 대종사는“귀한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를 오셨느냐?”며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라면서 당신이 알고 있는 분야는 대답할 수 있지만 엉뚱한 일을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며 손에 들고 있는 염주를 가르키며 “염주 깎는 법은 가르쳐줄 수 있다”고 했다.
숙겁의 인연이었던지 허심탄회하게 각자가 묻어온 인생의 의문 하나씩을 여쭈기 시작했다.
60세의 민자연화는 삼세를 알고 싶다고 하였고, 30대말인 이성각은 정도와 사도를 알고 싶다고 했다. 이어 20대말의 젊은 이공주가 자신은 삼세와 정도·사도 두 가지 모두를 다 알고 싶다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에게 욕심이 많다며 앞으로 모두 다 가르쳐주겠다고 한 후, 평소에 사람을 많이 대하면 상기(上氣)가 잘 되는데 오늘은 하기(下氣)가 되어 기분이 좋다고 했다.
민자연화와 이성각은 집 가까이(1km정도) 봉익동에 있는 대각사 백용성 스님의 제자이므로 불명이 있으니 이공주의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공주(共珠)라 하며 써보라고 했다. 공주라고 정성스럽게 쓰고 나자 말했다. “구슬이란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 구슬은 한 두 사람이 가지고 보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가지고 보는 것이 가치 있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공주’라 하는 것은 세계인류가 함께 보는 보배로운 구슬이 되어달라는 뜻이요….”이렇게 하여 즉석에서 제자가 되어 이경길에서 이공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영신의 입교
그로부터 이틀 뒤인 음 10월 28일 이성각의 딸 김영신까지 4명이 다시 창신동을 찾았다.
이공주는 정식으로 법명이 적힌 교도증을 받았다. 이때 함께 동행했던 김영신도 제자가 되어 법명을 받았다.
이때 김영신은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학교대표 육상선수로 출전하였다가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상처가 급성뇌막염으로 진행되어 사경을 헤매인 적이 있어 얼굴에 상처가 있었다.
한창 꿈이 많은 나이인데 무슨 소원이 있느냐는 소태산 대종사의 물음에 “얼굴에 상처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나 불법을 배워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 설교로 감화를 주고 싶다”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부처님 공부를 하면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상처를 낫게 해주는 의술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민자연화, 이성각은 법명을 받지 않고 있다가 이듬해(원기10년) 2월6일(음1월14일) 이공주의 연원으로 불명을 두고 정식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어 법명을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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