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회상 정기훈련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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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회상 정기훈련을 시작하다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6.0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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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


박사시화 형제 회갑식 기념사진


원기9년 음11월에 총부 본관인 도치원이 완공되었다.
새 회상은 회관 기둥에 ‘佛法硏究會’라는 서중안 회장의 글씨를 써 붙여 세상에 처음으로 공포하였다. 정산종사의 <불법연구회 창건사>에는 회관공사 전무 노력자는 12인이라 기록하고 있다. 원기9년도 전무출신자는 영산에 있는 김기천, 이원화를 합하여 13인이며 회원 수는 남자 60여명, 여자 70여명, 총 130여명이었다.
회중 자산은 영산 간척답(정관평)이 있으나 염독이 남아있어 큰 소득이 없고 길룡리 영산원 3동(영산원, 학원실, 식당채), 봉래정사 2동(석두암, 실상초당), 본관 도치원 2동(현 본원실, 세탁부) 등 초가 총 7동이었다.

제1회 정기훈련
총부 본관이 건축되어 전무출신자가 10여명에 이르나 유지방법과 생활이 곤궁했다. 그리하여 원기9년 음12월경 엿방 운영을 송적벽, 김광선이 주무가 되고 모든 인원이 행상이 되어 갖은 고생을 하였으나 큰 이득이 없고 공부에 방해가 되어 이듬해 여름에 폐지하였다.
원기 10년 음3월 혁신교리와 제도를 지도하기 위하여 상시훈련법과 정기훈련법을 발표하였다. 6월26일(음5월6일)에는 훈련법의 규정에 의하여 정기훈련을 실시하였다. 이것이 새 회상 제1회 정기훈련이다. 당시 총부 구내의 가옥이 협착하여 총부 본관 옆에 있는 전음광의 사가를 빌려 정산종사의 지도아래 10여명이 입선 전문훈련을 받았다. 정기훈련을 정기선이라 하여 제1회 정기훈련을 일명 을축하선(乙丑夏禪)이라 부른다.
제1회 정기훈련에 남자들은 전주 이청춘이 논을 희사하여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정기훈련에 참여하지 못하고 여자 선객만이 참여하였다. 10여명의 선객 중에 경성회원은 박사시화, 이동진화, 김삼매화가 참여하였다.
박사시화는 제1회부터 매년 여름과 겨울 정기훈련에 참여하여 젊은이들을 능가할 만큼 정성을 다 할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이면 새로운 선객에게 세숫물 떠다주기, 식사 때면 바리때(밥그릇)닦아주기, 남의 의복을 세탁하여 주기 등 자신의 괴로움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자비심으로 임하여 대하는 사람마다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였다.
익산본관 생활은 제1회 정기훈련 전까지만 해도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생활로 엿방을 차려 엿장수로 생계를 유지하고, 세간 살림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태산 대종사의 진지상을 차릴 때에도 납작한 목침에다 상을 올려드리고 제자들은 둥근상에 둘러앉아 먹었다.

박사시화, 1대내 575명 입교
박사시화는 제1회 정기훈련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가 총부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자신의 세간 집기까지 가져와 총부 건설에 살림들을 도왔다.
원기12년 제6회 정기훈련(무진동선)에는 박사시화, 박공명선 쌍둥이 자매가 참여하였다. 선중에 쌍둥이 자매의 회갑연이 열리고 기념촬영까지 하자 진기한 행사라 하여 동아일보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박사시화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교직 없는 교역자로서 제1대내 575명을 입교시켜 최다 입교연원자가 되었다.
이동진화는 만덕산 만덕암에서 20여 일간 선을 나고 경성 창신동 수양채에서 생활하다 제1회 정기훈련이 시작된다는 말에 기다렸단 듯이 침모인 김삼매화를 동행하고 참여하였다.
같이 선에 참여하였던 권동화의 말에 의하면 이동진화는 남치마에 노랑저고리를 단정하고 우아하게 차려입고 내려왔다. 선을 나기 전에는 도도하고 까다로워 신경질을 잘 내었으나 훈련을 통하여 기질이 변화되어 소태산 대종사를 깍듯이 모시고 6살 아래인 지도교무 정산종사에게도 일기 쓰는 법을 물어가며 공부에 열성이었다.
몸치장에서도 짙게 하던 화장을 약하게 하고 같이 선을 나는 동지들에게도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동진화는 3개월 정기훈련을 나면서 지병인 소화불량증세도 좋아지고 속이 답답하여 피우던 담배인 삐죤도 끊고 은단으로 대용하였다. 3개월 동안 훈련을 나고 해제날을 앞두고 떠나기 섭섭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이동진화가 속이 답답할 때 먹던 은단(銀丹)에 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먹던 가오루(은단 상품이름)가 떨어져 서무부장 오창건에게 솜리(이리내) 나가는 편에 가오루를 사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오후에 오창건이 사가지고 온 것은 엉뚱하게도 생선 가오리를 사온 것이다.
『가오루를 사오랬는데....』
『이거 가오리가 아니다요』
『은단 가오루 말입니다』
『은단은 또 뭐라요, 가오리라면 이것 뿐 이지라』
시골에서 은단이며 가오루라는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왕 사온 것이라 가오리로 대중공양 잘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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