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자자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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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자자들 13
  • 한울안신문
  • 승인 2006.08.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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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선이 곧 죽게 생겼다"


경성교당 창립주의 한사람인 감낙원이 원기15년 8월11일(윤6월17일)에 열반하였다.
김낙원은 집도 없이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면서 쌀 두말과 2원을 받아 병든 남편과 외손남매를 키우면서 죽는 날까지 매월 1원씩 유지비를 내었다.
그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낙도생활을 하면서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남의 집이요 나의 참 집은 불법연구회니 만약 내가 죽게 되면 우리 집인 창신동 교당에 가서 죽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의 집에서 열반하였다.

김낙원의 열반과 복제법
부음을 접한 소태산 대종사도 윤20일 친히 상경하여 추도한 후 『수많은 회원이 있는데 회원이 죽을 때마다 내가 다닐 수 없으나 김낙원의 열반은 경성지부에서 처음 당하는 일로 복제법을 실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반회원의 이해가 부족하므로 특별히 내가 왔다』고 상경한 뜻을 밝혔다. 이어 윤27일 김낙원 복제일 식전에 소태산 대종사는 복제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불법연구회에서는 회원이 죽으면 서로 복(服)을 입어 주는 법이 있다. 복은 의복으로 입지 아니하고 복기(服旗)를 제작하여 사용한다. 복기일도 본회의 공부계와 사업계 실헌(實獻)많은 회원에게는 1등복 49일, 그보다 조금 못한 회원은 2등복 28일, 3등복 14일, 4등복 3일, 5등급 당일. 이와 같이 각자의 공도를 보아 입어준다. 금번 김낙원은 공부 사업계의 중대한 유공인이라 말할 수 없으나 경성지부에 한하여서는 공도가 많은 창립주고 또한 같은 뜻 같은 발원으로 동고동락한 동지로 4등복에 해당하며, 같은 단원은 일신을 같은 형제와 같은 중한 의를 맺었으니 5등복을 입어줌이 마땅하다』
김낙원의 열반으로 상경한 소태산 대종사는 경성출장소에 머물면서 8월29일(음7월6일) 예회에서 『공부를 하기로 할진데 배워 갈 줄을 알라』등의 법문을 하시었다.
음7월6일 경성출장소 예회 후에 있었던 일을 김영신은 후에 회고하였다.
예회가 끝나고 나자 박공명선이 대중공양을 하기 위하여 부엌으로 들어간 후 소태산 대종사는 회원들에게 말했다.
『공명선이 곧 죽게 생겼다』
때 아닌 말씀에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다.
『만일에 죽거들랑 공주는 돈을 대고, 자연화는 총 감독을 하고, 성각이는 바느질하고, 삼매화는 식사대접을 하고, 영신이는 심부름을 해라』
『어떻게 예회 보러 온 사람에게 그러십니까?』
『어허, 모르는 소리, 너희들은 모른다. 내가 쉽게 얘기해주마. 식은 밥하고 갓 지은 밥을 봐라, 갓 지은 밥은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김이 올라가는 것이 보이고 식은 밥은 가까이에서도 김 오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너희들이 모르니까 그렇지 공명선이는 식은 밥이 되어간다.』회원들은 믿어지지 않았다.
박공명선은 원기 15년 음5월에 복통이 발병하여 각방으로 치료하였으나 효차를 보지 못하여 6월부터는 식음을 전폐 하다시피 했다. 그러면서도 박공명선은 예회에 참석하여 대중공양을 하는 등 몸을 아끼지 않았다.

박공명선의 열반
무남독녀인 성성원의 집에서 살고 있던 공명선은 딸이 임신하여 해산을 기다리고 있어 임실에서 시어머니가 상경하여 있었다. 그리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의 병은 위암이었다. 병간호 할 사람이 없자, 본관에서 경오하선(원기15년 음6월6일~8월6일)에 입선 중이던 쌍둥이 언니인 박사시화가 음7월25일에 상경하여 간호를 하였다. 자신의 병이 지중하여 회생치 못할 줄을 안 공명선은 아이를 출산한지 사흘 된 딸 성성원을 불러 간곡히 말했다.
『내가 죽은 후에도 종사주께 더욱 정성을 다하고 이모님(박사시화)을 나와 같이 극진히 시봉하라, 내가 평소 금전이 없어 회중 사업에 보조를 못한 것이 철천(徹天)의 한이니 나 죽은 후라도 본관 법상보(法床褓) 하나는 네가 꼭 해드리고….』라는 유언을 하고 음28일 밤에 염불을 하며 열반하였다. 성성원이 해산한지 몇 일 되지 않아 소태산 대종사가 미리 일러 준대로 경성 회원들이 상장을 맡아 치렀다.
?익산본관에 박공명선의 열반소식을 전했다. <월말통신>제 33호 -박공명선 여사의 인상과 진정루- 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월전에 열반하신 경성의 고 박공명선씨는 실로 인간에서 보기 드문 천진심(天眞心)을 키우신 분이었습니다 그 어느 날 경성지부에서 발간한 씨의 열반에 관한 서류가 익산 본관에 도착되어 각 통의 추도문이며, 씨의 열반에 대한 감상을 낭독 소개하던 중 그 최후의 일식(一息)이 있을 때까지 종사주를 존승하고 본회를 사랑하고 동지를 애호하신 그 열정에 대하여 듣는 자 누구나 다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 중략 …
그 뿐만 아니라 그 서류의 감정을 받기 위하여 기자가 종사주께 독고(獨告)하던 중 친형 사시화씨의 추도문에 이르러서는 종사주께옵서도 성안이 몽롱하여지시며 자연히 눈물을 내리시었습니다.
그런즉 금력을 가지고도 사오지 못할 진정의 눈물, 권력을 가지고도 얻어 오지 못할 그 진정의 눈물, 과연 이 세상에는 자기의 신후(身後)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진정의 눈물을 흘리게 할 자가 몇이나 되는고, 아 다복 할손 공명선 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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