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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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1.0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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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지 ㅅ건이 터지다.


원기22년 5월6일(음3월26일) 제9회 총대회에 이완철, 이동진화, 지환선, 성성원과 이현국이 대리 출석하여 총 5명이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경성지부 이완철 교무는 지부장을 겸임하는 인사가 되었다. 이동진화가 병으로 휴무하자 재가 교도로 33세의 성성원이 경성교무로 임명되었다. 성성원은 5년간 교무로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성지부는 교무들이 총회 참석차 총부에 가고, 총부에서 상경한 박창기와 정라선, 서대인, 김삼매화가 지부에서 있을 때, 조선일보의 자매지인 『조광(朝光)』지 기자가 찾아와 취재하고 돌아갔다. 조광지는 1937년 2월 당시 300여 명 신도를 살육한 백백교 사건으로 사회가 놀라있을 때 ‘사교 백백교 사건의 정체’를 밝히고 이어서 5개 유사 종교를 폭로한다고 했다. 조광은 편집후기에서 『본지는 이 사건의 정체를 당국의 허락한 범위 내에서 이면을 샅샅이 뒤져 다시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동시에 유사종교가 얼마나 우매한 인민대중을 기만하였는가를 폭로하기 위하여 본지는 특파기자 수인을 파견하여 이제 10여 개단체의 이면을 샅샅이 뒤지었다. 본 호의 자랑거리라 할 것이다』라고 자랑하였다. 『조광』지가 폭로한 5개 유사종교 단체 중 맨 앞에 ‘교주를 생불삼은 불법연구회 정체’라는 제하로 불법연구회에 대하여 익명의 기자 이름으로 악의에 찬 기사를 발표했다. 『조광』지 기사를 보고 불법연구회를 아는 사람은 모두 분개하였다. 익산 총부에서는 조광지의 문제는 『<불법연구회의 정체해부>라 하여놓고 익산 총부에 와서 한 마디의 물음도 없었으며, 또는 당국에 대하여도 일차의 진상조사도 없이 다만 저 경성 일우에 있는 설비 불안전한 한 지부에 겸하여 주재자도 없을 때 가서 마침 집 지키고 있는 수인(數人)의 어린 사람을 상대로 한두마디의 수작을 교환하고 간 후에 그와 같이 황당무계한 허구기사를 발표한 것이외다』며 강구대책을 세우기 위해 5월25~26일 익산총부 요인회를 소집하였다. 요인회에서 여러 가지 격양된 감정과 흥분된 주장이 다수 제출되었다. 소태산 대종사 이에 대해 말했다. 『사람이 세간에 나타나서 사업을 경영하는 땅에 있어서는 사실 유무를 막론하고 선악의 평판이 의례히 따르는 바이며 더구나 이번 기사 내용을 보건대 근자 사교 백백교 사건의 발생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하여진 이 기회에 어떠한 기자의 일시적 호기심에서 철모르는 붓 장난을 한 것인 듯 하니 이를 부지 일소하고 마는 것이 좋으나 적어도 반만의 대중을 가진 단체의 체면상 그와 같이 무근한 말을 듣고 그저 묵과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절대로 그들과 상대하여 투쟁을 할 것이 아니라 금일이라도 사람이 가서 본회의 취지와 실행사업을 철저히 설명하여 회사의 오해를 일소하고 그 인식을 바로잡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다.』 총부에서는 5월29일 회중 대표로 서정원장 이재철과 공익부장 유허일이 경성 태평로 1가에 있는 조선일보사를 방문하여 방응모 사장과 관계자를 만나 조광지 기사내용이 사실무근임을 설명하는 동시에 재차 상세히 조사하여 보아서 그보다 더 악한 사실이라도 있을 것 같으면 근본적으로 폭로 배격할 것이요, 만약 사실이 없다면 그것은 귀사의 책임이니 기사 정정은 물로 다시 반복이라도 하는 것이 사회 공중 표현기관으로서 도가 아니냐고 정중히 요구하였다. 조선일보사에서 호의로 받아들여 그로부터 이틀 뒤인 6월1일 전북특파원과 이리지국장이 총부를 찾아와 각 부분의 실행 사업을 일일이 관찰하고 조광지의 기사가 사실무근임을 확인하고 불법연구회와 소태산 대종사에 대하여 취재하여 8월10일 『조선일보』 3면에 ‘불교 혁신 실천자 불법연구회 박중빈씨’라는 제하에 기사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조광은 ‘불법연구회 탐방기’를 『조광』 10월호에 해명기사 없이 무성의하게 발표하였다. 개성출장소 설립 개성에 살면서 경성지부로 2년간 한번도 예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던 이천륜 회원이 개성에도 회관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전하여 원기22년 음11월경에 신병으로 휴무를 하며 치료 중이던 이동진화 교무가 김영신 교무에게 권하여 함께 개성에 출장을 다니며 이천륜 회원 일가 6명과, 김영신 교무의 여고 동창인 원진출행 일가 10여 명이 입교해 학원을 빌려 예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원기23년 개성회원들의 요청에 소태산 대종사는 김영신 교무를 개성으로 파견하기로 하여 김영신 교무는 2월3일 개성으로 출발하였다. 김영신 교무는 이천륜 회원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교화를 하였다. 김영신 교무와 개성 회원들이 개성 출장소 설립을 고민하는 모습에 이천륜의 남편 김정호씨는 13간 기와집 건물대금을 이희영은 모친 김성두화를 위하여 500여 평의 대지 대금을 희사하여 3,400원에 건물과 대지를 매입하여 ‘개성출장소’간판을 붙였다. 김영신 교무는 개성 출장소 소식도 전할 겸 익산총부 동선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와 원기24년 3월 하순부터 가옥수리에 들어갔다. 익산 총부에서 오창건 교무가 파견되어 출장소 수리 감역을 하여 약3개월여 만에 1,300여 원을 들여 수리가 완료되어 100여 명을 수용할 만한 회관이 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개성출장소 상황도 볼 겸, 원기24년 양 5월22일 박창기를 데리고 상경하여 경성지부에서 양력5월26일 예회에서 설법하시고 6월3일 경성지부회원 다수와 개성출장소에 도착하였다. 개성회원들의 환영 속에 개성출장소에 도착한 소태산 대종사는 6월4일 예회에서 설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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