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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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그 제자들-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2.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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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부인병원과의 인연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 소태산 대종사 원기28년 5월16일 총부 대각전 예회에서 최후 설법을 하시고, 오후에 자리에 누워 익산에 총부를 건설한지 18년 만인 6월1일(음4,29일)열반에 들었다.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소식을 들은 경성지부 회원들도 어느 제자들 못지 않은 슬픔에 잠겼을 것이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 발인식에 경성회원 누구누구가 참석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경성지부에 하숙하며 경복중학교 재학 중이었던 소태산 대종사 3남 박광진은 6월1일 밤 열차로 성성원과 함께 익산총부로 향했다. 성성원은 소태산 대종사의 유체(遺體:몸)를 영구보존하기 위해 경찰 공의(公醫)로 있는 남편 진 박사(진주현 외과의사)를 통하여 알코올을 서너병 구해 가지고 왔다.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하자 유체를 유리관에 영구보관 하자는 의견이 있어 황정신행은 일본에서 유리관을 구해와 모시겠다고 하였으나 일경이 강력하게 화장을 주장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태산 대종사 장례는 9일장으로 신청하였으나 6일장으로 단축되었다. 6월6일 오전 10시 총부 대각전에서 열린 발인식은 불교시보사 김태흡 스님의 주례로 이루어졌다. 소태산 대종사의 세수는 53세요, 깨달음을 얻고 가르침을 편지 28년, 익산총부를 건설한지 만 18년만의 일이었다. 소태산 대종사 발인식을 마친 이틀 후인 원기 28년 6월8일 경성출장소 제2대 교무를 역임했던 정산 송규 종사가 제2대 종법사로 취임했다.


동대문 부인병원의 전무출신들 일제는 2차대전에서 패전의 빛이 날로 짙어져 가는 가운데 총부를 비롯한 각 지부의 범종 및 유기를 헌납이라는 미명아래 강제 공출하였다. 예회는 집회계를 제출하여 임석 경관의 설교 감청을 받아야 했으며, 국방 헌금과 근로 동원이 가중되었다. 총부 남자 청년은 징용을 피하기 위하여 산업대라는 이름으로 각지에 분산되고, 여자 청년 임원들도 정신대를 면하기 위하여 사무요원을 제외하고는 공장 혹은 병원에 분산 취업하였다.


동대문 부인병원은 원기23년(1938) 10월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병원 관계자가 황정신행의 남편 강익하에게 인수할 것을 제의하여 병원건물 4층 1동과 2층 주택과 대지를 인수한 것이다. 황정신행은 병원을 운영하다가 모교인 이화여전에 부속병원으로 쓸 수 있게 원기26년(1941) 3월부터 3년 동안 위탁 경영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황정신행은 병원은 위탁하였으나 2층 주택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일제 탄압에 의한 정신대를 면하기 위해 여자 청년 임원들은 황정신행의 주선으로 이화여전 부속 병원에서 근무를 함으로써 일제의 막바지 탄압을 모면했다.


원기 28년 9월부터 황정신행 소유의 서울 동대문 부인병원(현 이화여대부속병원)으로 송자명, 이용진을 시작으로 송영봉, 박은섭, 김서업, 정양진 등이 파견되었다. 박은섭, 이용진, 송영봉은 간호보조로 병원에서 일을 하고, 송자명, 김서업, 정양진은 병원살림을 주관했다.


당시 산부인과에는 환자가 40여 명에 이르러 힘겨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방에 연료로 석탄을 때다 일제 말엽에는 석탄이 없어 쇠로 된 통에 더운물을 넣어서 온기를 유지하며 겨울을 지냈다. 하루 종일 병원의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숙소인 병원 4층이 너무 추워 근육통이 생겨 오늘날까지 고생을 하고 있다고 회고하는 송영봉 교무는 때로는 숙소 창문을 열고, 동대문 전차 종점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전차를 하염없이 쳐다 보기도 한 일도 있었다고 당시를 증언했다.


익산 총부에서는 당시 공익부장인 박장식이 병원에 가끔 들러 격려하며 위로해 주곤 하였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여자 청년들은 당시 1개월 급료(일본 돈으로 14원)를 받아서 총부로 보내 주었으며, 명절 때는 교대로 돈암리 경성지부에 가서 지냈다. 송영봉과 이용진, 정양진이 2년여로 가장 오래 병원에서 근무를 했다. 동대문 부인병원을 인수한 황정신행은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면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곤 했다. 어느 날 소태산 대종사 동대문 부인병원에 황정신행이 초대하여 가자 소태산 대종사께 그 동안 무서워했던 지하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내용이 일화로 전해진다.


동대문 부인병원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이 죽었다. 매일 가마솥에 한 솥씩 미역국을 끓여 산모들에게 대주곤 하던 두 아주머니가 지하실 방에서 구공탄 아궁이를 열어놓고, 방문을 꽁꽁 닫고 자다가 변을 당하였던 것이다. 시체를 내 온 사람들이 두 눈을 파랗게 뜨고 죽었다 하여, 그 뒤 아무도 지하실에 내려가는 사람이 없었다. 황정신행이 소태산 대종사께 말했다. “무서워서 아이들이 지하실에 가려고도 않아요. 종사님, 귀신 좀 쫓아 주세요” “거 무슨 소리냐. 어디 가보더라고” “안됩니다” 나무 층계가 삐걱거리는 지하실 문을 열고 소태산 대종사 앞장섰다. 황정신행은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소태사 대종사 지하실을 이곳 저곳 둘러보며 겁을 먹고 따라온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런거 어디 있느냐! 요망스러운 것들, 암시랑도 않는데 그러냐”하고 지하실을 나왔다. 그 뒤로 지하실의 무섬증은 사라지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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