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제자들-서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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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대종사의 서울교화와 제자들-서문성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3.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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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15광복과 전제동포 구호사업 2


서울구호소는 서울역을 중심으로 구호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9월10일 남대문통 5정목 70번지 세브란스 병원 앞 적산가옥 3층집 마사무네 상회 기린비루 술집에다 정하였다. 광천목에다 세로글씨로 ‘불법연구회 귀환동포구호소’라는 표기를 내걸고 서울역 앞에서 전재동포들을 안내하였다.


1층은 급식소, 2층은 사무소로 불법연구회에서 사용하고 3층은 개인이 사진관으로 사용하였다. 그 당시 서울지역의 전재동포구호사업소 본부는 서울 시청에 있었다. 송도성은 서울 시청에 찾아가 미군정청하의 시장인 크롬 웰슨과 김형민 부시장에게 “불법연구회가 구호사업을 하려고 서울역전에 표기를 내걸어 놓았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라며 협조를 구했으나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


구호사업 처음엔 일본군이 남기고 간 담요, 옷가지, 모자 등을 나누어주었다. 구호물자 등의 어려움을 겪다 서울지부 황정신행 주무의 외교와 노력으로 구호물자를 미군의 협조허락을 얻어 수색에 있는 미군부대에 가서 식량과 의복 등 구호물자를 트럭으로 실어왔다.


연일 귀환동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중국 귀환동포, 소련군의 진입으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전재민들, 부산항에서 올라오는 귀환동포들이 연일 물밀 듯이 서울역에 내렸다. 김윤중, 정자균, 정성집 등 남자 임원들은 서울역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전재민들을 구호소로 안내하여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무임승차권을 지급하였다. 형편이 딱한 사람들은 의복, 신발, 담요 등을 주었다. 이성신·정재윤 등과 서울지부 회원들은 따뜻한 물과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다.


보통 하루에 사오백명이 몰려와 임원들이 모자라 송도성 부소장도 서울역에 나가서 직접 임원들과 함께 일을 하고 박창기도 총부에서 올라와 구호사업을 도왔다. 구호소 사무실에서는 이중정이 회계를 담당하였다. 구호사업 물자관리 등으로 인하여 서울지부에서 사용하던 남자 숙소를 구호소 2층 사무실로 옮겨와 숙소를 겸했다. 송도성은 의자에서 자고 남자임원들은 동선을 바닥에 깔고 잠자리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선이 합선되어 이불에 불이 붙어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고 이중정 원로교무는 말했다.


구호소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하룻밤을 자고 가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구호소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삼사백미터 거리에 위치한 현 청하빌딩 인근 적산가옥과 여관을 활용하여 잠을 재워 이튿날 연고지로 떠나도록 하였다.


환자들은 구호소 앞 세브란스병원에 의사 몇 사람이 남아있으나 병원은 텅 비어있어 그곳에서 치료받도록 하였다. 구호소 임원들은 전염병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의 뒷처리까지 하며 고아들을 어디로 보낼 수 없어 임시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용하며 돌봐주었다. ?


미군들은 불법연구회 회원들의 헌신적인 구호사업에 감복하여 구호품을 가져오고 구호사업 활약상을 무비카메라로 취재해 가기도 하였다. 당시 다른 구호소 단체에서는 구호물자가 유실되거나 빼돌리는 경우도 있었으나 불법연구회에서는 그런 일은 일체 없었다.


송도성 부소장은 “양발 한 켤레라도 저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주어라”고 강조하였다. 이런 헌신적인 활동에 미군들뿐만이 아니라 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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