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천의 패러다임과 교화1-최진수(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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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천의 패러다임과 교화1-최진수(윤호)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4.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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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천의 패러다임


선천시대와 후천시대의 패러다임의 다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우주에는 큰 변혁기가 있는데 그것이 크게 일대겁을 통해 돌아오고 또 나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천이란 음시대고 어둡고 닫힌 시대요, 후천은 크고 밝게 열린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선천시대와 후천시대에는 여러 가지 다른점이 많은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한가지를 든다면, 저는 주체와 주인공이라고 칭하는 실체 유무가 모든 일에 있어서 내 밖에 있느냐 내 안에 있느냐로 구분하고 싶습니다.



선천시대에는 권리와 권한과 주체와 주인공은 밖에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가령 예를 들어 영웅, 황제, 지도자, 메시아 등은 항상 내 밖에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잘난 무엇인가가 나타나서 어떤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데 그것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내가 설사 그런 지도자 또는 황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구조 역시, 다른 사람은 얕고 낮다는 전제를 기본으로 깔고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높다라는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얄궂은 이 상극의 구조는 바로 선천시대의 모습이었습니다.



# 후천시대는 모두가 존중받는 구조
그럼 후천시대에는 어떠하냐? 내 친구와 동료 형제들이 모두 다 한꺼번에 대우받고 존중받는 구조입니다. 후천시대에는 가능합니다. 후천시대인 지금 현재의 시대상과 모습을 보십시오.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만 있으면 누구나 어떤 분야에서든 그 분야의 주인공으로서 충분히 멋지게 살 수가 있습니다. 상대처를 필요치 않더라도 자신의 떳떳한 모습을 충분히 드러내며 왕자, 공주처럼도 충분히 잘 지낼 수가 있습니다.



후천시대를 살면서 선천시대, 구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부분은 없는지 좀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그런일은 10킬로 미터 장거리를 가면서 다른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나는 걸어서 가는 경우와 같다고 봅니다. 세상은 이미 멀찌감치 가고 있는데 과거의 방식으로 살면 그 어떤 진전이 있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많은 부분이 있지만 교화에 대해서 몇가지만 짚어 보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누구나를 다 주인공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교화를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설교를 예를 들겠습니다.


교당을 30년간 다니면서, 설교 듣기 위주로 30년을 지낸 사람과 강연 하기를 위주로 30년을 지낸 교도가 있다면 그 둘의 실력차이는 과연 어떠할까요? 아마도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공부 실력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도 지역사회에서 좋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멋진 지도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원불교에서 강연은 누가 합니까? 아무나 다 하지 않습니까? 친구, 형제, 나, 누나, 동생 등등 아무나 다 하지 않습니까? 평범한 범부를 부처로 만들어 내는 이 희한한 방법은 후천시대에나 통하는 우리의 교법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50년전만 해도 강연의 위치는 안 그랬습니다. 후천시대인 지금에는 강연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얼마나 이를 강조하며 행하고 있습니까?



회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렇게 잘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대체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말입니까? 오직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복잡한 세상 살아오신 연륜 그 자체만으로도 할 이야기가 많으신 분들이 태반입니다. 그 경험치들을 서로 교류할 수 있게만 자리를 놔 드려도 이미 서로가 서로를 진급, 발전시킬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배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말이 되었든 뜻이 되었든 교류를 하는 중에 생겨나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할 때 생겨나는 그 존재감은 사실 종교가에서 이루고자 하는 삶의 가장 큰 핵심과 닮기도 합니다. 이 따뜻함과 성장이 함께 있는 회화를 지금 우리들은 얼마만큼 강조하며 사용하고 있습니까?



지금 교법 교법하면서 무언가 가르치려고만 하시는 분들은 안타깝지만 선천시대 개념에 사로 잡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모른다 이 좋은 교법을, 또는 정법을, 또는 이 정통맥을. 그래서 너는 이 좋은 교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당해야 한다- 라는 개념은 이제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상대편은 언제나 주인공이 아닌 변두리 사람으로 끝나게 됩니다.



내 제자, 내 가르침을 당하는 사람과 같은 개념으로 상대를 보아서는 그 자체가 선천시대의 차별성 개념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 결과로서 상대편도 역시 항상 선천시대의 상황, 즉 주인공이 아닌 부림을 당하는 사람, 그래서 삶에 있어서 전혀 역동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모든 상황이 끝나게 됩니다. 새로운 지도인, 지도자, 선지식은 주인공이라는 개념이 없이는 탄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선천시대 구조에서는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개념이 먼저 생깁니다.


후천시대 개념에서는 저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운다는 개념이 먼저 생깁니다.


같은 얘기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가르친다는 개념은 너는 모른다. 나는 안다. 그래서 가르친다라는 개념입니다.



# 교도 쌍방간 배우는 시스템 필요
배운다는 개념은 저 사람에게서 배울점은 무엇일까? 를 먼저 생각한다는 말인데 그 발상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주인공으로서, 어떠한 분야든지 그 주체로서 인정을 하지 않고서는 생겨나지가 않는 발상입니다.


가령 내가 유치원생 수준인데 연륜 지긋하신 교장선생님을 뵌다면 뭔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상대이더라도 교장선생님처럼 높여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사고 방식, 생각 구조, 이것이 후천시대 발상입니다.


이 발상은 세상사람 누구나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으로 기본 전제로 깔고 있지 않고서는 생기지가 않는 발상입니다.



너는 가르침을 당해야 한다는 선천시대 발상은 세상사의 많고 많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출가세가 아니라 이 현 세상에는 많은 선지자, 선지식, 지도인, 지식인들이 있어야 하는데 특정하게 잘난 사람 몇몇이 누군가를 선도하는 방식을 가지고서는 세상사의 이렇게 많고 많은 일들을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 여러나라의 복잡한 많은 일들은 나를 포함, 우리 옆에 있는 아주 단순한 평범한 친구, 부모, 형제들처럼 그 아무나 누구든지 저절로 지식인 지도인 선지식으로, 마치 변신 로보트처럼 변신되고 발전되는 시스템에서라야 해결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야 세상에 필요한, 참된 진인의 그 필요한 숫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후천시대에 살면서 선천시대 발상으로 교화선상에 있지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선천시대 말기에 나셨으면서도 후천시대의 가르침과 행동으로 수 많은 우리 선진님들을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의 선도자요, 지도인으로 성장을 시키셨습니다.


지금 교화가 정체인 이유는 주인공을 만들어 내는 시스템인 후천시대의 시스템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가르침을 받아야 되는 대상이다 하는 정도의 위치를 재가 교도들이 차지하고 있는 한 교화 성장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재가 교도들이 사업하는 주체의 사람 정도로나 대우받는 한 교화 성장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교도 쌍방간에 배우게끔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정기훈련 이외에도, 법회만 다녀도 저절로 지도인이 되게끔 할 수 있는 후천시대에 맞는 새로운 법회 시스템을 도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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