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로 본 원불교의 나갈 길-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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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로 본 원불교의 나갈 길-김용옥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6.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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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의 좋은 점을 개발해야 한다.

현대 한국사회에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을 억압적으로 대하는 거대종교가 있다.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어느 정도의 보호가 있을 수 있는데, 종교에 관해서는 테러라고 할 만큼의 위협이 심각할 정도가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건강한 종교문화가 싹틀 수 있을지 의문이다.


소태산은 영광에서 대각을 했지만, 서양의 선지자들(예수)은 사막에서 대각을 이뤘다. 광대한 사막을 몇 시간이고 거닐어 보라. 무소유를 깨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이사야가 그랬듯 예수도 40일간 사막에서 시험 당하며 대각을 이룬 분이다.


하지만 소태산이 실제 존재했던 사람인 데에 의심이 없는 반면, 예수는 30세에 각을 하고 33세에 열반을 했다. 너무 짧은 시간동안 ‘반짝’한 뒤 제자들에 의해 그 사상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예수는 당시 우리말로 ‘철수’ 같은 개념이다. 당시에는 세례 요한처럼 예수가 많았다.



구약을 벗어나라


유대인의 역사는 ‘노예의 역사’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한 위대한 이집트 문명이 바로 서양 문명의 기원이자 다신의 문화였다. 하지만 같은 지역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유일신 사상으로 인간의 범위를 단절시켰다. 이삭의 열두 아들이 애굽(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야훼에 의해 출애굽 하면서, 야훼는 그들에게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며 계약을 한다.


이것이 바로 구약(옛날 약속)이다. 유대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며 ‘~하지 마라’는 율법을 계약 조건으로 한 것이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율법이라는 것은 모세 오경에 쓰여진 계약조건이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노예로 팔려 다니던 유대인들은 이 야훼의 율법에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몇 천년을 이어오며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의 예수들 중 세례 요한은 분명한 정사의 기록을 갖고 있지만, 이 예수는 성경 외에 정사의 기록이 없다. 물론 종교는 기록보다는 믿음이지만, 예수의 부활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 여인이 무덤에 들어갔는데 시체가 없더라’는 마가복음 내용이 최초인데, 이후 다른 복음서들이 추가를 한 것이다. 또한 당대 강력한 스승이었던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 요한의 문하생으로 있다가 깨달음을 통해 독립한 뒤,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신약’이다. 그렇다면 계약이 바뀌었으니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어야 하는데, 한국 기독교는 왜 주저할까? 대표적으로 십일조 내라는 말은 신약에 전혀 나오지 않는 말이다. 구약이 휴지조각이 되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문제들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구약은 율법(노예해방을 위한 야훼와의 계약)이나, 신약은 사랑(인간해방을 위한 수정 계약)이다.???



예수는 인간해방론자 밀떡 5개와 북어 2마리를 5천명이 나눠먹었다는 게 예수의 사랑이었다. 사실인지 여부를 따지기 보다는 그 숭고한 사랑을 봐야 한다. 예수는 폭리를 취했던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신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를 괘씸케 생각한 배부른 사람들이 그를 죽인 것이다. 유대인의 비참한 노예상황과 율법에 시달려온 민족의 상황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외쳤다는 예수의 그 운동에 주목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는 성경이 없던 역사다. 성경은 AD 367년 이후 성립된 것으로, 기독교는 원래 행동의 종교이지 성경의 종교가 아니다. 최초의 기독교 문헌은 사도 바울의 편지글인데, 이 글들은 모두 추상적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죄를 사했다? -


예수가 그런 말을 했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당시 헬레니즘 시대 철학을 공부했던 지식인들이 이러한 사도 바울의 추상성에 회의감을 갖게 되었는데, 이 무렵(AD 70년) 마가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기쁜 소식(복음)이라는 예수의 전기를 썼다. 그런데 당시는 기록지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한 사람(소리꾼)이 읽고 교인들이 듣는 식으로 문화가 전파되었다. 즉, 복음서는 일종의 판소리 형식으로 전해졌다.


그러기에 그 감동을 더해 기록하면서 증보판들이 나온다. 더 많은 창작이 섞여 신화로 창조된 것이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을 일러 공간복음서라 하는데, AD 100년 이들을 바탕으로 요한이 복음서 하나를 더 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며 심오한 이론으로 표현했기에 기독교가 다시금 몇 천년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요한복음을 불교의 금강경과 같이, 깊은 철학으로 종교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독교 운동은 4복음서에 힘을 얻어 발전해 왔으며,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공인함으로서 로마의 국교가 된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탄압받았던 것처럼 다른 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 예수는 기존의 생각을 바꿔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자고 했던 사람이다. 다시 말해, 당시 유대의 많은 예수들이 민족 해방론자였다면, 이 예수는 인간 해방론자였던 것이다.



원불교가 해야 할 일 원불교가 당면한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 첫째로, 상상력의 구속이 심하다. 소태산의 혁명적 사고 등 강렬한 메시지가 너무 점잖고 맥없이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지금은 종교의 구원이나 억압에 욕심을 버리고, ‘우리의 실존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돈 걷어 건물 크게 짓고 할 때가 아니다. 셋째, 너무 빈틈이 없으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종교는 사회를 리드하지 말고 역사의 뒤에서 어머니처럼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넷째, 종교가 시대에 너무 빨리 적응해 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원불교, 새로운 계기들이 나와야 한다.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을 만드는 교육을 해야 한다.


여러분들의 미덕으로부터 10명의 인재만 만들어라. 다양한 사람을 길러라. 다섯째, 원불교는 이미 조직적으로 성숙되어 있다. 종교 냄새 안피우면서 유불선의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종교는 이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한 식구로서 애절하고 간절하게 호소한다. 깨달은 대로 실천해 가자. 그래서 우리 사회가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만들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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