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성교무의 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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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성교무의 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 6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7.1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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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타원 김삼매화 정사


경성출장소 창립 발기시 살림을 담당하기로 자원하여 헌신적인 생활을 하였던 낙타원 김삼매화는 서울 창인동에서 부친 김성초 선생과 모친 탁씨의 3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결혼하였으나 25세에 부부간의 파탄이 생겨 친가로 돌아온 후, 이동진화의 집에 딸려서 바느질품을 파는 침모(針母) 생활을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 원기 9년에 처음 상경하여 경복궁 앞 당주동에 경성임시출장소를 마련하고, 1개월여를 머물 때 박사시화의 인도로 이동진화가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였고, 김삼매화는 이동진화의 인도로 귀의하였다.


원기 9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소태산 대종사 만덕산에서 선을 날 때 김삼매화는 이동진화를 따라가 선(禪)에 동참하였다. 그 후 제1회 정기훈련인 을축동선부터 서울과 익산총부를 내왕하며 정기선(定期禪)에 이동진화와 동정(動靜)을 함께 했다.


원기 11년에 이동진화가 창신동 자신의 수양채를 교단에 희사하여 경성출장소가 설립되자 김삼매화는 회관 관리와 식당담당을 자원하여 창립주가 되었다.


김삼매화는 이동진화가 출가하자 자신도 원기 19년에 출가하여 경성지부 감원으로 초창기 간고한 살림을 이끌어 나갔다. 원기 28년부터 원기 29년 열반시까지 총부 식당 주무로 어려운 총부 살림을 알뜰히 꾸려나가는 등 초기교단의 이름없는 주인으로 봉공하였다.


김삼매화가 총부 식당 주무로 있으며 식당에서 육물을 썰고 있는 것을 본 소태산 대종사 김삼매화에게 “그대는 도산지옥(刀山地獄)을 구경 하였는가”하고 물으니 “구경하지 못하였나이다”하였다. 소태산 대종사 “도마 위의 고기가 도산지옥에 있나니 죽을 때에도 도끼로 찍히고 칼로 찢겨서 천 포 만 포가 되었으며 여러 사람이 사다가 또한 집에서 그렇게 천 칼 만 칼로 써니 어찌 두렵지 아니 하리요”라고 하였다.


김삼매화는 박사시화의 시봉을 위하여 이청춘·이공주와 함께 은모시녀(恩母恃女) 결의식을 하여 삼자매로 새 회상 창립 유공인인 박사시화를 받들었다. 원기 13년 제1대 제1회 총회시 김삼매화의 공부는 보통부, 사업등급은 6등이었으며, 원기 38년 제1대 성업봉찬대회시 공부는 정식법마상전급, 사업은 준1등으로 원성적 정2등이었다.


원기 73년 제2대 말 성업봉찬시 김삼매화의 공부성적을 정식법강항마위로 추존하였다. 좌산 이광정 상사가 7월 25일부터 8월 15일까지 오덕훈련원에서 20여 일간 머물며 하계정양을 실시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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