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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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화 창립 유공인들 8
  • 한울안신문
  • 승인 2007.08.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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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타원 이정원


경성출장소 창립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동참했던 희타원 이정원은 경남 고성에서 부친 이씨와 모친 오씨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사별하고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16세에 김씨 문중에 출가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나 37세에 남편을 여의고 곤궁한 가운데 자녀를 양육하여 결혼을 시켰다. 하지만 딸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들 또한 가난하여 조선의 갑부였던 경운동 민영휘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다. 그 집에서 고향사람 심오운과 의지하며 살면서 심중에 오직 도덕군자 만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던 중 고향 이웃 고을인 통영출신 장적조를 만나 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소식을 듣고 생불님 한 번 만나기를 염원하였다.


이정원은 원기 10년 말 이성각으로부터 소태산 대종사 상경하여 계동 이공주집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집에서 생활하며 생불님 만나기를 염원하던 김낙원, 심오운과 함께 달려와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귀의하였다. 이날은 이공주의 30회 생일이었다. 경성회원 이공주, 이성각, 박사시화 등과 새로 귀의한 이정원, 김낙원, 심오운 등이 함께한 자리에서 소태산 대종사는 이공주에게 ‘도덕박사'가 되라는 법문을 하였다. 그 후 원기 11년 경성출장소 창립을 위한 발기할 때 김낙원, 심오운과 함께 참여하여 매월 유지비 등 교도의 의무를 다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 상경하여 창신동 경성출장소와 계동 이공주집에 머물면 남의 집 살이 하는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 청법낙도 하였다. 또한 경성출장소 예회에 부득이 참석하지 못하면 예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회원들과 함께 계동 이공주집에 모여 야회를 보았다.


이정원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 금생에 좀 더 복을 짓고 선연을 맺어 보리라 결심하여 소태산 대종사와 교법을 봉대하는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정원은 어느날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받들다 “어떻게 하여야 증애에 끌리지 아니하고 원만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나이까?”라고 증애에 끌리지 않는 방법을 여쭈었다.


소태산 대종사 이정원의 물음에 “매양 한 생각을 잘 돌리는데 있나니(중략)” 라는 법문을 하였다. 그 때의 법문이 <대종경> 인도품 18장이다. 원기 13년 제1대 제1회 총회시 이정원의 공부는 보통부, 총공금(總功金)은 125원 70전, 사업은 6등이며, 원기 38년 제1대 성업봉찬대회 시 공부는 정식법마상전급, 사업은 정4등으로 원성적 준3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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