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항쟁과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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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과 항쟁과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
  • 한울안신문
  • 승인 2008.07.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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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화 교수 (상지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대선 전부터 대통령 선거에 대한 전망의 일환으로 다양하게 예측되었던 쟁점이다. 그 예측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위기가 정권의 위기로 전화되어 나타난 것은 뜻밖의 사건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권의 위기로 전화시킨,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전개의 매개변수는 촛불이며 그 계기는 미국산 쇠고기였다. 이 과정은 너무 빨라서 마치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두 달 이상 지속된 촛불이 새로 출범한 권력을 태워 버렸다는 사실과 새 정부가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며, 여기서 몇 가지 의미 있는 해석을 추론할 수 있다.




촛불과 한국 민주주의 새로운 전망


첫째, 민주주의의 위기가 정권의 위기로 전화되는 메커니즘은 민주적 관성의 이탈에 있다. 정권의 위기는 반민주적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진앙에 쇠고기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고속 주행하는 자동차의 핸들을 급조작하면 자동차가 전복되는 것처럼 위기의 근저에는 이명박 정부가 국정운영의 기조를 단기간에 과격하게 전환한 조급함이 존재하며, 그 반민주적 단절과정이 정권에 치명타를 가했다.


둘째, 촛불과 이명박 정부 사이의 무한대치가 예상되고 있다. 단기 국면적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다. 촛불은 이명박 대통령을 식물대통령으로 만들어버렸다. 또 촛불을 밝히도록 한 여러 사회경제적 현안들 중에서 쇠고기 문제가 사회운동적으로 상징화된 상황에서 쇠고기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촛불의 소진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그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신중하지 못한 결정으로 인해 촛불과 미국 사이에서 갈등적 제로섬 게임일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셋째, 이명박 정부의 위기를 ‘이중권력’으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국민이나 촛불이 권력일 수 없는 상태에서 이명박 권력을 제외한 어떤 잠재적 대안권력도 존재하지 않는 현 국면을 ‘이중권력’으로 진단하는 것은 과잉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경합하는 권력들 사이에서의 이중권력 상태가 아니라 경합 부재의 상황에서 스스로 ‘식물권력’으로 전락했다는 진단이 옳다. 이중권력이 잠재적 대안에 의해 후퇴를 강요당하는 상태라면 식물권력은 스스로 자진한 상태이다.


촛불과 권력의 대결에서 촛불은 절대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촛불은 일시적으로 꺼질 수도 있고, 중단될 수도 있고, 불길이 약화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권력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촛불의 운동적 자립화로 인해 권력은 촛불을 압도할 수 없게 되었다. 때때로 촛불은 여학생, 수녀, 비구니, 젊은 엄마를 상징하는 여성성을 강하게 표방하지만 개념을 확장하면 학생과 젊은 층을 상징하고, 종교계를 상징하고, 시민사회를 상징하고, 노동계를 상징하는 전사회적 포괄성을 갖는다.


이것은 촛불의 힘이 사회적 다양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다양성의 민주주의가’ 운동의 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촛불은 또한 대의민주주의의 가치와 필요성을 존중하되 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논의가 서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국가에서 대의민주주의는 국민투표, 대통령선거, 국민발안, 지방자치 등 다양한 방식의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현대사회의 특징인 사회적 다양성의 증가로 인해 대의민주주의는 더 큰 보완이 요구되고 있으며, 그 결과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의 무리한 정책이 파열의 틈새를 내는 순간 지난 20년간의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한 민주주의의 힘은 그 작은 파열구를 따라 강력하게 분출되었다. 그리고는 두 달 만에 촛불항쟁의 대오를 갖추면서 새 정부의 정책기조를 좌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새 정부의 가동 자체를 중단시켜 버렸다. 이만한 수준의 국민정치 파업이 또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엄청난 위력을 믿지 못하겠다면 다음 사례를 생각해보자.


촛불은 출범 초기에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기사로 넘쳐나야 할 신문과 방송을 점령해 버렸다. 모든 언론은 대통령과 정부에 주목하는 대신 촛불을 따르고 있다. 논조만 다를 뿐 조·중·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촛불은 3개월 된 새내기 대통령과 정부의 지지율을 20% 아래로 끌어내렸다. 대통령제가 아니면 정권이 즉각 교체될 엄청난 사건이다. 촛불은 내각과 청와대의 인사를 뒤흔들었고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 앞 세종로 사거리를 항구적으로 점령해 버렸다. 대통령의 동정란과 새 정부의 정책란에 촛불이 등장하면서 대통령과 정부가 사라져 버린 상황, 촛불이 정부정책을 대신하고 촛불소녀가 이명박 대통령을 대신하는 상황은 정권 교체와 어떻게 다른가?


이 같은 사실에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권력과 재벌과 일부 언론의 막강한 파워에도 불구하고 정치·사회적 변동이 동반되는 복합국면에서 정치를 압도하고, 권력을 압도하고, 재벌과 수구보수 언론을 압도하는 시민사회의 역사적 추진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한국의 상황에서 국가나 권력핵심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위가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끄빌이 미국 민주주의를(유럽과 달리 노동운동이 취약한) 결사체 민주주의라고 했다면 80년대 이후 우리의 민주화 과정 역시 그러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90년대의 특정 시기에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의 전성기가 짧게 존재한 것을 제외한다면 80~90년대는 재야민주화운동이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으로 분화되는 과정이었고, 2000년대는 길 위의 조직화된 시민운동이 온라인상의 무수하게 많은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에게 역할의 일부를 양도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촛불항쟁은 그 간의 유사 온라인파를 압도하는 ‘진정한 온라인파’의 등장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을 식물화 하고, 새 정부를 무력화 하고, 여의도 정치를 압도함에도 불구하고 촛불의 한계 또한 자명하다. 광우병의 위험에 노출된 미국산 쇠고기라는 정형화된 논법에서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촛불에는 6·8혁명이 표방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내용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쇠고기에 대한 반대담론의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문화적 코드와 자발성에 기초한 대중적 동원은 반대와 비판 및 담론형성의 가장 전형적인 지형을 형성하는 반면, 대안의 조직화와 프로그램의 기획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한계는 정치적 한계이다. 권력과 정부에 대항하는 모든 저항은 사회적 차원의 진정성과 파급 효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차원의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 4월혁명, 서울의 봄, 6월항쟁의 역사적 교훈이었다. 4월혁명은 신구파 갈등으로 내연하는 민주당에 접수되어 좌절되었고, 서울의 봄과 6월항쟁은 권력을 추구하는 3김씨에 의해 왜곡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촛불을 접수하거나 왜곡할 정치세력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며, 그 밖의 어떤 정치적 대안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촛불항쟁이 과거의 다른 항쟁보다도 정치적으로 더욱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촛불의 정치적 취약성은 촛불항쟁 자체의 정치적 취약성 때문인 동시에 촛불항쟁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 현재의 취약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국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촛불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항쟁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낮으며, 촛불은 이들의 정치적 지원과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촛불을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할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결국, 단기적으로 두 가지 전망이 가능해진다.


무엇보다도, 한나라당과 수구·보수세력의 ‘잃어버린 10년’ 프로젝트는 시작 이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이 되었고, 권력의 정당성은 근원적으로 손상당했다. 따라서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초기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특단의 조치 또한 가능성이 높지 않다. 성격과 차원을 달리 하는 문제지만, 5공 전두환 정권이 광주학살의 멍에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명박 정권은 광우병 쇠고기의 멍에를 벗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설령 쇠고기 문제가 잦아든다고 하더라도 촛불항쟁으로 각인된 집단적 기억의 정치에 의해 제2, 제3의 촛불은 끊임없이 타올라 이명박 정권을 태우고 또 태울 것이다.


또 하나, 한국 민주주의는 갈등적 교착 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촛불은 권력을 태우고 이명박 대통령을 식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그 이상의 대안을 발전시키기 어렵다. 식물화된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어떤 대안적 선택의 여지도 없다. 촛불을 이어받거나 이를 자원화 할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다. 촛불로 인해 만들어진 정치적 공간은 매우 넓고 매우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지만, 그 공간은 장기간의 진공 상태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민주주의의 우울한 전망은 여기서 비롯된다.




다시 역사적 전환을 모색하며


5월 2일 시작된 촛불은 10대 중반의 천진난만한 촛불소녀들을 한국사회의 중심무대로 불러들였다. 그 소녀들이 한국사회를 바꾸어가고 있다. 마치 중·고등학생들이 50년 전 이승만 정부를 붕괴시키고, 대학생들이 20~30년 전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 경험처럼, 한국은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고 있다. 촛불소녀들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기성 정치권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권은 완전히 왕따의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어쩌면 태어나서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을 조·중·동에게 ‘쓰레기’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그리고 곧 쓰레기가 되어 버렸다.


촛불은 작년 12월 19일 헌법이 정한 대통령선거로 만들어진 정치상황을 일순간에 무력화시켰다. 그 힘은 출범한 새 정부를 거의 말기정부 양상으로 몰아갔다. 선거에서 승리한 집단이 지난 10년 동안 쉬지 않고 외쳤던 ‘잃어버린 10년’은 촛불소녀들이 광화문에서 외친 몇 차례의 ‘쇠고기 반대’ 구호에 날아가 버렸다. 촛불은 기성 권력과 기성 정치, 기성 언론의 권위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기성 사회운동의 권위도 무너뜨리고 말았다. 촛불은 21년 전 같은 자리에서 군사정권을 몰아낸 재야 할아버지들과 대학생 오빠들의 권위를 대체해 버린 것은 물론 낙선운동과 탄핵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2000년대의 한국사회를 움직여온 시민운동의 권위까지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마지막으로, 촛불은 온라인 공간의 활동성을 오프라인에 화려하게 구현해 보임으로써 시민권 없는 가상공간에 영예로운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오프라인에 진지를 둔 온라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음의 아고라, 아프리카와 컬러TV, 가상공간의 수많은 인적네트워크들이 촛불에 불을 붙이고,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모든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지난 몇 년간 추상적 수준에서 논의되었던 87년 체제의 종언이 촛불항쟁을 계기로 명백하게 정리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결국, 다시 한 번 전환의 계기를 맞은 셈이지만 촛불의 특성상 그 변화의 방향을 단시일 안에 포착해 내는 것은 쉽지 않거니와 변화의 흐름을 만들고 추동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오랜만에, 아마도 20년 만에 우리 사회가 다시 한 번 모색의 시기와 맞닥뜨린 것 같다. 집단적 모색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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