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제2세기의 비전' - 은덕문화원 원불교 열린날 기념 도올 김용옥 박사 초청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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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제2세기의 비전' - 은덕문화원 원불교 열린날 기념 도올 김용옥 박사 초청특강
  • 한울안신문
  • 승인 2010.04.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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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종교로 나가려면 위대한 학자나 인물을 기르는 핵심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은덕문화원이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으신 4월을 맞이해 200여명의 소태산아카데미 동문 ‘개벽지기’들이 참가한 가운데 도올 김용옥 박사를 초청해 ‘원불교 제2세기의 비전’을 주제로 특강을 실시했다.


이선종 은덕문화원장은 강의에 앞서 도올 김용옥 박사를 “원불교를 사랑하고 원불교에 기대하고 원불교를 걱정하며 1차적 비판을 넘어 대안을 제시해 주시는 원불교 밖에서 원불교를 돕는 분”으로 소개한 뒤 “원불교 제1세기를 마감하고 제2세기의 희망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하면 교법을 인격화하고, 사회구원의 해법을 구현해 나가는 보은불사를 할 수 있을지 깊이 성찰해보고 결속을 다지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이날 특강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 원불교 제2세기의 비전은


인재양성에 총체적 노력을 기울여야


오늘의 원불교가 있기까지는 사람의 힘이 중요하였다. 원불교 제2세기의 비전은 인재양성에 총체적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아무리 많은 불사가 이루어진다하여도 근본이 틀어지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교학과생들 교육이기에 나는 의미를 두고 강의를 시작했다. 앞으로 교단전체가 교학대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총력을 기울여 돕지 않으면 안 되며, 만약 교학대학에 문제가 있다면 공론을 통해 최대공약수를 뽑아내는 자리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종법사님을 비롯한 교단의 수장들이 정례적으로 이러한 자리를 만들어 최상의 교육장을 만들어줘야 한다. 원불교는 교리상으로도 개방되어 있고 모든 종교의 교리를 수용하는 진리적 종교인만큼 원불교 교리를 폭넓게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줘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 원불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 개벽은 새롭게 연다는 근본적 변화이며


개방정신으로 모든 가능성을 수용하는 것


이러한 역할 수행이 곳곳에서 이뤄지려면 우리가 지성적으로 개방되어야 한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개방하자는 의미이다. 개벽이라는 것은 새롭게 연다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가 참으로 개방정신을 가지고 모든 가능성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원불교는 걱정이 없다. 원불교 교리는 거짓이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아무데나 던져놔도 빛이 난다. 그러나 원불교가 위대해 지려면 나 같은 인재를 내부에서 많이 길러내야 한다. 원불교 자체 내에서 위대한 학자나 인물들을 양성하는 핵심 체제를 기르지 않으면 제2세기의 희망이 없다.


소태산 대종사를 보라! 그는 의문이 많았다. 무언가 근본적인 물음이 있었고 그 근본적인 물음을 추구하다 병이 난 것이고 대각에 이르렀다. 그렇듯 현재 교학과 학생들이 그렇게 의문이 나야하고 병이 날정도로 문제의식에 투철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 교학과 학생들이 대종사 글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대종사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 모든 종교나 진리는 형성 중에 있다.


(All religion is in the making)


기독교는 2000여 성상을 거쳐 형성되어 온 것이다. 이 말은 곧, 모든 종교가 한 시점에서의 완성된 고정적 모습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세기의 기독교나 21세기의 기독교가 다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의 모습이다. 기독교는 물론 예수교(예수의 가르침)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역사적 예수 (Historical Jesus)가 과연 누구인지 모든 신학자의 견해가 분분하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The New Testament)도 똑같이 2000여 성상을 거쳐 같이 형성되어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의 정본은 어느 곳에도 없다. 예수가 죽은 것이 AD 30년경이고 최초의 복음서가 작성된 것이 AD 70년경이라고 한다면 이 40년간의 공백기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예수교가 기독교로 전환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변화는 매우 창조적인,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들이 충돌을 일으키고 또 조정되어 간 과정이었다. 예수교의 직접경전이 있는가? 다시 말해서 역사적 예수가 살았을 당시 그의 가르침을 적어놓은 기록이 있는가? 단언컨대 이러한 기록은 없다. 예수는 행위자이지 이론가가 아니다. 실천가이지 웅변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AD 30년과 AD 70년 사이에 일체의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 질문에 가장 결정적인 답을 주는 것이 바울 서한이다. 사도 바울(Paul the Apostle)은 소아시아·그리스 지역에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하면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비슷한 기독교 거점들을 만들었고, 그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사상가로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유려한 희랍어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다. 이 편지들을 ‘바울 서한’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서한들이 현재 기독교 정경의 최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울의 서한 속에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언급이 일절 없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의식과 문장세계 속에는 나사렛 예수도, 갈릴리 군중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는 예루살렘의 예수도 없다. 바울의 예수는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는 노상에서 계시된 예수일 뿐이다. 그 계시된 예수(Revealed Jesus)는 오직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Resurrected Jesus)일 뿐이다. 그의 계시 속에 부활한 예수는 추상적 예수(Abstract Jesus)이며, 추상적 예수인 만큼 이론적 예수(Theoretical Jesus)였다. 그의 서한문 전체가 초기기독교 교단 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노력이다. 그 핵심은 ‘예수의 부활’인 동시에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신봉하는 모든 사람들의 부활이다. 그 부활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그 부활사상의 핵심에 바로 그가 말하는‘하나님의 의(義)(the righteousness of God)’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미 바울은 예수교를 설(說)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설한 것이다. 그러니까 유감스럽게도 역사적 성격이 확실한 바울 서한을 통해서도 우리는 역사적 예수를 발견할 길이 없는 것이다.


예수가 죽었다 부활했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야기’이지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의 환상적 체험 속에서 생겨난 이야기일 뿐이다. 그 이야기를 심오한 철학적 관념으로 해설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에 관한 타인의 담론이지 예수 자신의 말씀이 아니다. 그 ‘말씀’이 아닌 ‘이야기’를 최초로 문서화한 복음서가 AD70 마가복음서이며, 이러한 공관복음서의 기록들과 내면적 연관성이 확보되며, 그 보다 앞선 프로토텍스트 AD 50년에 성립한 것으로 발견된 114개의 예수 가라사대 파편 ‘도마복음’은 성경 자체의 이해를 풍요롭게 만드는 진본일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하는 위대한, 아니 가히 혁명적인 문헌임이 밝혀지고 있다.


모든 종교나 진리는 형성 중에 있다 (All religion is in the making). 완결은 죽음이다. 이러한 논리는 원불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미래로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인가? 원불교도 또 다른 기독교를 만들 것인가? 소태산대종사의 오리지널한 가르침에서 또 다른 기독교를 만들 것인가? 원불교 2세기를 맞이하며 당면한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도 무언가 의식을 가지고 원불교가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우리가 어떠한 방향을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 세계 종교로 원불교가 나아가려면 소태


산 대종사를 능가하는 인물이 많이 나와야


원불교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인생과 우주에 대한 깊은 의문을 가지고 어려운 난세에도 골똘하고 집요하게 파헤치며 대각을 얻으시고, 정관평 공사 등 일심합력의 노동으로 건강한 사회적 기능을 일궈낸 결과가 오늘의 원불교를 만들었다. 이처럼 교리상으로 뛰어나게 원불교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원불교가 될 수가 없다. 우선 구체적인 사회적인 기능을 통해서 그 동네사람들을 작은 것으로부터 교화시키고 거기서 뭔가 개간을 해서 땅을 만들어 그것이 생명의 땅이 되고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되는 끝없는 건전한 방법으로 오늘날의 원불교를 이끌어 온 것이다.


오늘날 예수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예수는 정말로 대각을 하신 분인데, 이 대각의 구조를 사도바울이 바꾸고 복음서 내용에서 바꾸는 것을 보면 아찔하다. 무릇 바울은 예찬할 수 있다. 당대에 로마사회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예수스타일로서는 헬레니즘 사회를 전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잘 알았기에 부활과 예수의 십자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적인 예수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원불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에 우선 원불교는 신화적 구조가 없다. 소태산 대종사는 신화가 되면 큰 일 난다. 원불교가 앞으로 100년대를 향해 나가려면 그야말로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잘 공부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태산 대종사를 능가하는 그런 인물들이 계속 나와야 원불교의 미래가 있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보다 못한 사람들이니까 열심히 배워라만 강조하면 안 된다.


전반적으로 오늘 우리가 이 시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가 교학대 학생들을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키우고 우리 교무님들을 어떻게 키워갈 것인가를 과감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이 원불교학을 더 쉽게 파악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왜? 그 만큼 풍부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구조가 다른 사람들보다 정밀하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세계 종교로 원불교가 나아가려면 그런 인물들을 원불교가 어떻게 키우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우리가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개방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종교라는 것이 삶의 구조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기독교가 난리쳐도 안가면 그만인 세상이다. 종교는 집단적 의무가 아닌 개인의 선택이 되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종교의 변화는 종교는 이미 개인의 선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종교가 그야말로 그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의미 있는 일로 시대를 앞서가지 않으면 그 선택의 대상에서 탈락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기에 제2세기의 도약을 놓고 원불교가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 여러분이 이제 원불교의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 나갈 것인가에 적극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하나하나 작은 문제에서부터 진실한 뜻이 모아져서 큰일을 이루는 것이니까. 그것을 부정적으로 깎아 내리기보다 무언가 인정해주고 우리사회에 역사적 사실을 만들어가는 계기를 삼자.


우리가 마음은 크게 가져야 한다. 일심사상, 한마음, 큰마음으로 모두를 포용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포용을 하고 사회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지원해 주고 어떻게든지 원불교라는 이 공동의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모였으니 종교인이 가질 수 있는 고착적 사고를 버리고 끝까지 공부하자는 것이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이 시대에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진짜를 아는 시대가 오고 있다. 가짜는 간다. 그러니 걱정 마시고 여러분이 원불교를 진짜로 만들어 주시라.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사은님께 감사 올린다.




정리 : 이공현 교무(은덕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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