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토론 -‘진공묘유眞空妙有와 선과 악’의 분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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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토론 -‘진공묘유眞空妙有와 선과 악’의 분기점
  • 한울안신문
  • 승인 2014.09.2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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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

최근 원불교 종합정보시스템(원티스) 교역자광장을 뜨겁게 달군 ‘진공묘유(眞空妙有)와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논쟁을 재가, 출가가 함께하는 공개적인 교리 토론의 장을 열기 위해 지면으로 옮겨왔다.
‘진공묘유의 조화 속에 선과 악은어떻게발현하는가?’, ‘ 분별성과 주착심도 진리의 작용인가?’하
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대해 다함께 참여하고 토론하여 원기 백년을 맞아 자신 성업봉찬의 기회로 만들기 위해 본 기획을 준비했다.
이번에 소개된 견해에 이견이나 덧붙일 내용이 있으신 독자들은 A4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투고해
주시면 언제든지 소개하여 진지한 토론을 이어갈 예정이다. - 편집자 주




진공묘유(원만구족 지공무사)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1
김관진 교무 (상동교당)



논지의 핵심은 ‘묘유를 적적성성한 자성의 혜광으로만 볼 것인가?’아니면‘분별성, 주착심도 모두 자성의 발현이요 성품의 작용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저는 후자의 입장으로 글을 올립니다.
「정전」수행편의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까지를 진공묘유로 주장하는 의견에 대하여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까지를 진공묘유라고 밝혔습니다.
「정전」에서 진공묘유의 조화는 일원상 진리의 모습이며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자재로 전개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에서 선악업보의 차별이 생겨나는 것이며, 사생은 심신작용을 따라 진급과 강급으로 은생어해(恩生於害),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무량세계(無量世界)를 전개해 가는 것으로 우주만유뿐만 아니라 심지의 세계도 선과 악이 성품을 떠나 일어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먼저 진공묘유의 동시성으로 진공과 묘유는 둘로 나누어 볼 수 없습니다. 진공묘유는 번뇌가 곧 보리임을, 파도가 바다를 벗어나 일어나지 않음과 같은 원리로 바다 자체에는 파도가 없으며 파도는 바람 등 외적 조건인 경계를 따라 일어납니다.
바다가 파도인 측면으로 보면 전부 바다 아님이 없지만 파도 자체로만 보면 파도가 바다는 아닙니다. 파도는 파도 자체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성품을 떠난 마음은 없습니다.
분별성 주착심이 성품을 떠나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성품의 변한 것임을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 본래 자리로 돌려 세우자는 것 입니다.
성품을 떠나 일어난 것이 아니므로 마음이 동할 때 분별성, 주착심도 모두가 성품의 발현임을 알아차리는 그 영지(靈知), 이것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 따라 나타나는 자성으로 자성을 세울 때 경계는 경계일 뿐, 경계는 공부거리, 공부찬스입니다.
또한 묘유는 밝은 것, 옳은 것, 좋은 것만 아니라 사랑과 미움도 음과 양이 다 묘유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양면성입니다. 그 어떤 마음도 회피하거나 억압하지 아니하고 직면하고 수용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여 공부 삼자는 것입니다. 양면성의 진리가 음양 상승의 원리를 따라 인과 보응하는 것임을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을 때 모든 경계가 은혜이며 처처불상에 대한 관점도 같이 수용 됩니다.


말씀하시기를“본래 선악 염정이 없는 우리 본성에서 범성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본성에 소소 영령한 영지가 있기 때문이니, 중생은 그 영지가 경계를 대하매 습관과 업력에 끌리어 종종의 망상이 나고, 부처는 영지로 경계를 비추되 항상 자성을 회광반조 하는지라 그 영지가 외경에 쏠리지 아니하고 오직 청정한 혜광이 앞에 나타나나니, 이것이 부처와 중생의 다른 점이니라.”(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1장)




악(惡)도 자성(自性)을 통해 발현?-1
김형진 교무 (영산성지사무소)


회상 창립의 역사가 백년을 앞두고 있다. 교단 구성원들은 소태산 대종사님 이래로 현재 경산 종법사님에 이르기까지 자신 성업봉찬이라는 교단적 개인적인 큰 화두를 지니고 있다.


여러 스승님들께서 강조하는 자신 성업봉찬에서 큰 핵심을 요약하자면 마음공부가 가장 중요하고 현실적인 것이라 생각된다.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마음공부에도 표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표준을 잘못 잡게 되면 공부가 힘들거나 엉뚱한 길로 나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무엇인가? 이런 대 명제로부터 마음공부는 시작하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일원상의 진리에서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라고 밝히셨다.
일원은, 온갖 분별과, 생멸과 선악과 언어가 다 끊어진 자리다. 진리에 악(惡)은 없느냐고 질문하시는데, 단연코 없다. 이 없다는 말은 단멸로서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공의 세계에서는 이런 분별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성품의 특징이 그대로 공(空)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신령스러운 앎이 있어서 이것이 작용을 하게 된다.
이 작용이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서 대상을 따라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고 언어명상이 완연하게 무시광겁을 통해 은현자재로 나타난다고 밝혔다. 일원상 수행에서는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 양성하자는 것, 사용하자는 것이 일원상의 수행이라고 밝혔다.
일원의 진리, 자성 본원에서는 죄복과 선악업보가 완전히 끊어졌기에「정전」염불법에서는 이 자리를 일러 자심미타라고 하였는데, 여기라야만이 우리들의 업이 소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더 단순하게 접근해 보면, 보고 듣고 아는 이놈이 바로 마음이다. 이거다 저거다 그냥 분별하지 않고 보고 듣고 아는 그 영지를 일러 마음이라고 한다.


이 마음은 역대 스승님들로부터 조사와 너와 나에 이르기까지 다를 바가 없고, 차별이 없다.
이 마음이 그대로 우리의 현실 생활에 연결이 될 때를 일러서 진공 즉 묘유라고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다생겁래를 통해 오고 갈 때에 각자가 닦아온 바가 다르고 익혀온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대하는 것인데도 어떤 것은 쉽게 익히고 또 어떤 것은 어렵게 익힌다. 또는 처음 사람을 대할 때에도 어떤 이는 오랫동안 사귀어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은, 또 어떤 이는 낯설거나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 연유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래 지닌 이 성품의 특성이 왜곡됨이 없이 작용을 하면 좋은데, 각자가 업식에 따라 지어 놓은 바가 다 다르기 때문에 공적영지의 광명에 따라 작용할 때에 삼독심에 가려서 헛된 분별 망상과 삿된 욕심으로 작용하는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작용을 우리가 묘유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보조 지눌의「수심결」에서 일체 중생의 종종(種種)의 환화(幻化)가 다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생한다고 하는 구절을 악도 다 진공묘유라고 여기고 있는데, 수심결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자성을 여의지 않고 생하는 모든 것이 어찌 진공묘유가 아니냐는 뜻이다.
그러나 악(惡)도 자성을 통해 발현한다고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것은 성품 그대로를 발현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심의 무명이 나오는 것이지 성품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성 그대로가 발현되는 것을 일러 묘유라고 하지, 어찌 분별 주착심을 일러 묘유라고 하겠는가?



염정이원(染淨二元)과 염정불이(染淨不二)


유정엽 교무(득량교당)


수행에 있어 염과 정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원상 진리의 진공묘유는 인간의 분별심과 번뇌를 극복하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염정이원론(染淨二元論)적인 태도만으로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모두 포괄할 수 없고 몇 가지 심각한 교리의 모순을 만들게 됩니다. 먼저 진공묘유에 분별심은 들어가서 안 된다고 한다면‘분별심과 악(惡)’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일원이 우주만유의근원이라고 했는데‘ 분별심과 악’의 근원은 다른 것인가요?
다음은 처처불상의 해석이 옹색해집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교(邪敎)도 반면교사로 도움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의 안목에 기대에 일체를 은혜로 보는 세계관을 제시하셨는데, 염(染)과 정(淨)이 융회할 수 없는 것이라면 처처불상의 세계관이 성립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음은 대종사님께서도 원불교 공부의 바탕으로 삼으셨던 자성반조의 공부를 해석하기 어려워집니다. 마조로부터 비롯한 홍주종(洪州宗)의 선사들은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그대로 불성의 화현으로 보아, ‘살도음(殺盜淫)이 범행(梵行)’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염정의 대립을 넘어선 염정불이의 가르침은 원불교 수행의 중요한 뼈대이기도 합니다. 원불교의 세계관과 수행론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체가 허망하다(一切皆忘)’ ‘일체가 공하다(一切皆空)’ ‘일체가 모두 진실이다(一切皆眞)’는 세 가지 관점을 통합하여야 합니다.
먼저 일체개망(一切皆忘)의 관점에서 우리 중생은 무명에 인해 윤회를 거듭하는 존재이며, 이 세상은 오욕과 번뇌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우리 인간의실존적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악을 극복하고 선을 행하며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다음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관점에서 보면 천도법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처와 중생도 없고, 허무와 적멸도 없는’것이어서 악(惡)도 공(空)하고 번뇌(煩惱)도 공(空)하고 열반(涅槃)도 공(空)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생사와 열반이 공하기에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고 번뇌와 보리가 공하기에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의 수행은 무념(無念)을 중심으로 합니다. 선과 악을 억지로 갈라놓고, 무엇이 무엇을 극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닦으면 유위로 오히려 도에서 멀어진다고 조사들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일체개진(一切皆眞)의 측면에서 보면‘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또한 ‘탐진치‘ 역시 진리의 나타남이기에,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수행은 닦아도 닦지 않아도 그대로 부처라고 합니다.


이러한 수행을 임제 스님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그 곳이 진리의 세계)’라고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일견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세 가지의 세계관을 통합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일원상 진리의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닌 자리, 염과 정이 융회되는 자리에 바탕하여 번뇌와 탐진치를 극복하고 진여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대종사님께서 저희에게 내려주신 수행의 방법론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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